성령 세례 (고전 12:13)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파적인 교회였는데, 은사의 문제도 교회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답변은 고린도전서 124절로 요약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 그러므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고린도전서 1212절로 31절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듭니다. 지체는 여러 가지나, 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게 된 근거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분파로 분열되지 말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씀으로 인해서 성령 세례에 대해서 많은 신학적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Unfortunately, in the church today, the teaching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has become a battleground of confusion and division rather than a basis for clarity and unity. We are commanded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ph. 5:18), but being baptized by the Holy Spirit is not our responsibility. When we put our trust in Christ, the Holy Spirit baptizes us, permanently changing our membership from Satan’s family (John 8:44; 1 Jn. 3:8-10) to the family of God.

 

오늘은 우리가 물세례, 성령 세례, 그리고 성령 충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먼저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물세례와 (water baptism) 성령 세례에 (Spirit baptism) 대해서는 F. F. Bruce가 잘 정리한 것 같습니다: Faith-union with Christ brought his people into membership of the Spirit baptized community, while baptism in water was retained as the outward and visible sign of their incorporation ‘into Christ.’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을 때에 받는 것이고, 물 세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가입하였음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Warren Wiersbe 목사님이 잘 정리하였습니다: The baptism of the Spirit occurs at conversion when the Spirit enters the believing sinner, gives him new life, and makes his body the temple of God. To be baptized by the Spirit means that we belong to Christ’s body. The “filling of the Spirit” (Eph. 5:18 ff.) has to do with the Spirit’s control of our lives. Nowhere does the Scripture command us to seek the baptism of the Spirit, but we are commanded to be filled.

 

Life Application Bible Commentary13절의 전반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됨)을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후반부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성령 충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All believers receive the same Holy Spirit at the time of their conversion. This “receiving” of the Spirit is here called being “baptized by” the Spirit. The phase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means that the same Holy Spirit completely fills all believers’ innermost beings (Ephesians 5:18-20).

 

먼저 성경에 보면,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대조됩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 11절에서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고, 그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씻는 상징으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물 세례를 베풉니다. 고린도전서 12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물로 세례를 준 것과 같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물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세례란 성령을 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치는 예식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물세례는 죄씻음의 표이고, 성령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 받는 것이고,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별개로 나오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행전 8장과 19장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814절로 17절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보니까,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이 내리신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가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를 해서 성령을 받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별개의 사건으로 나옵니다. 기독교에는 그처럼 세례와 성령은 별개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두 개 있습니다. 카톨릭과 오순절 계통입니다. 카톨릭은 세례 후에 주교 혹은 감독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이 내린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주후 3세기의 키프리안의 글에 이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감독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으려고 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고위 성직자의 견진 성사를 통하여 성령이 내린다고 믿습니다. 또한 오순절 혹음 순복음 교회도 역시 예수를 믿고 물세례를 받는 것과 제2의 체험으로서 성령의 뜨거운 불세례 받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처럼 세례와 성령을 구별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그 성경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반면에 믿고 거듭나는 중생과 성령 받는 것을 하나로 보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사도행전 8장이 두통 거리입니다. 캄벨 몰간 목사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은 것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피할 길을 찾고, 저명한 성령론 학자인 제임스 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빌립을 믿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피할 길을 찾습니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들은 무언가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본문의 사건을 예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예외적인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재산을 공유하였다는 것도 그렇고, 거짓말 헌금을 했다가 즉사한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런 연장선 상에서 세례 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 오늘 본문의 기사를 예외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 예외적인 성령 강림 사건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나야만 했는가? 존 스토트 목사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반목과 장벽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물에서 물을 좀 길러 달라고 하시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의 전도로 복음이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서로 상종하지 않을 것인가? 서로 관계 없는 남남으로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한 성령을 받은 한 몸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성령을 내려주시는 예외적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와 결속의 증거로서 사도들의 공적인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2 13절도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에 연합시키는 것이 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를 한 몸이 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러한 예외적인 사도들의 성령 안수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192절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John Stott 목사님은 이 본문이 오순절파와 은사주의 집단이 주장하는 the second blessing (이차적 은혜 체험)의 증거 본문이 되어왔다고 말합니다. 바울과 대화를 나눈 에베소 지방의 제자들은 믿는 자였지만,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바울의 안수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도행전 19 2절은 예수를 믿는 것과 별도로 2차적인 성령 세례를 체험하는 일이 뒤따른다는 주장의 증거 본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타트 목사님은 에베소의 제자들이 아직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곧 성령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는 대답은 그들이 아직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4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5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 때에, 비로서 그들은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나오는 장면, 곧 사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는 일은 신약 성경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특수한 경우라고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말합니다.  

 

John MacArthur 목사님도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바울과 대화를 나눈 에베소의 제자들은 신자가 아니었다고 단언합니다. 1절에 보면 제자라는 단어가 나오고, 7절에 보면 그들이 열 두 사람쯤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라는 단어 때문에, 그들이 신자라는 느낌을 주지만, 마가복음 2 18절에 보면, 제자라는 단어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제자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6 66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에 많은 수가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고 물으셨고 ( 6:67),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 6:68). 헬라어로 제자 (mathetas) 라는 단어는 learner follower를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에베소의 열 두 제자도 아직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열 두 제자들이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을 때에, 바울은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한 불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5절에 보면,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를 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사도행전 8장과 19장의 안수를 근거로 예수를 믿고 물세례를 받은 다음에 2차적인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사도행전의 과도기적 (transitional)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역사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역사책이지 교리책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의 표준이 되는 교리는 바울이 교회들을 향하여 쓴 서신들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울 서신의 말씀들은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고린도전서 6 19절은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도 바울이 에베소의 열 두 제자에게 안수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게 한 사건은 오늘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이 (normative)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안수함으로 방언과 예언을 하는 사건은 그 후에 반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 1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안수를 해서 방언과 예언을 해야만, 여러분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우리 교회가 규범으로 따라야 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이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님이 나의 지정의, 인격 전체를 왕으로 다스리시는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명령은 수동태입니다. 곧 성령 충만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성령을 인간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이나 힘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 1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동태 명령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 명령은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을 한 번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극적으로는 죄를 멀리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스리며 거역할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계속 유지하려면,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자백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몸이 정결한 성령의 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을 받는 소극적인 준비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보다 적극적으로 말씀이 내 속에 충만히 거하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6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사용하시는 무기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즐겨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여러분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8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절에 보면, 그 생수란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우리 자신의 목만 축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흘러 넘치는 그릇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 내 심령이 만족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강물과 같이 흘러 나는 생수는 내 그릇을 다 채우고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의 그릇도 채워주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나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강물과 같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은 내 그릇을 다 채우고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의 그릇까지, 또 그 사람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그릇까지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가족과 교회와 이웃에게 하나님의 흘러 넘치는 은혜를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듯이, 여러분의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여러분의 기도하시는 대상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