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지체, 한 몸 (고전 12:12-3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절로 11절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은 한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몸과 지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앞에 고꾸라졌을 때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절의 그리스도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도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포인트는 다양성 중의 통일성입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한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몸의 지체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다 함께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바울이 12장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다양성과 (diversity) 통일성을 (unity)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God’s desire is that there be no division (“schism”) in the church. Diversity leads to disunity when the members compete with each other; but diversity leads to unity when the members care for one another.

 

고린도 교회의 중심 문제는 방언이었습니다. 14장에 보면, 방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예배 시간에 방언으로 공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방언으로 설교한다고 하면,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 설교가 무슨 유익을 교회에 끼치겠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을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사이에 이질감과 위화감이 조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엘리트로 자부한다든지, 나아가서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교회에 또 하나의 분파적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함께 열거할 때에, 방언을 마지막에 언급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린도전서 128절로 10절에서는 방언과 방언 통역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28절에도 방언은 돕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에 이어서 마지막에 나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28절에 보면 순위가 (order) 나와 있는데,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소멸된 직분이지만, 1순위에서 3순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적을 행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고 다스리는 은사가 나오고, 제일 마지막에 방언을 언급합니다.

 

Vernon McGee 목사님이 아틀란타의 어느 학교 졸업식에서 말씀을 전한 후에, 어떤 의사의 집에 저녁 식사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의사가 퀴즈를 내었는데, 아까 설교하실 때에 목사님의 어떤 지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tongue인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의사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엄지 발톱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엄지 발톱이 없었다면, 목사님은 강단에 서있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방언을 영어로 speaking in tongues 라고 하지요. 우리 몸에 혀만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교회에도 방언 외에도 귀히 쓰임 받는 은사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비다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바느질하는 기술이 있어서, 가난한 과부들에게 옷을 많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욥바에 가니까, 과부들이 슬피 울면서 도르가가 만들어 주었던 속옷과 겉옷을 내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기도해서 그녀를 다시 살렸다는 기사입니다. 도르가가 방언으로 기도만 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구제와 긍휼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D. A. Carson 교수는 21절은 소위 영적인 엘리트들이 하는 말이라고 해설합니다: Here the (elitist) members speak to those who they judge inferior in condescending tones: “I don’t need you!” The elitists may be either the so-called charismatics or those who oppose them. It is their attitude that Paul excoriates. The Christian who has any particular gift, whether tongues or anything else, has no right to dismiss the fellow believer who has some other gift.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independent entities가 아니라, interdependent parts 입니다. 너는 필요 없다는 생각은 심각한 교만입니다. 로마서 124절로 5절도 오늘 본문처럼 많은 지체와 한 몸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그 앞에 3절에 보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경에 ‘지혜롭게’ 라는 번역은 헬라어로 소프로네인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sober로 번역하였습니다. sober는 술취한 것의 반대말입니다. 술취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자아도취나 과대망상적인 기분에 휩싸입니다. 그러다가 술이 깬 후에야 맑은 정신, 제정신으로 돌아 옵니다. 그러므로 sober judgement를 하라는 것은 맑은 정신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제정신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온전한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12 3절에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구절이 있고, 6절에는 ‘믿음의 분수대로’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분량이나 분수의 分자는 나눌 분자입니다. 영어로 measure 혹은 proportion입니다. 또한 5절은 우리 각자는 많은 지체 중의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전체 교회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정신, 맑은 정신, 온전한 정신으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주제 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과대 평가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2 17절과 21절도 그 점을 말씀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만일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요?...눈이 손더러 너는 쓸데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너는 쓸데 없다 하지 못하리라.”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르다고 비판하는 사람, 너는 필요 없다고 정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지체됨을 망각한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같지 아니하면, 틀렸다고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눈 코 입을 각기 다르게 창조하시고, 그 눈 코 입에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창조하실 때에도 많은 지체로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다양한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생각과 스타일을 강요할 때에, 갈등과 상처가 생깁니다. 나는 충만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고, 일정한 분량 밖에 채우지 못한 분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수는 푼수하고 통합니다. 나는 푼수라고 생각하면, 성경적으로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에 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생각, 나의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자각, 나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온전해 진다는 겸손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설 것입니다.

 

예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제시 잭슨 목사가 비록 듀카키스에게 패배했지만, 그가 당시에 했던 연설은 길이 후대에 남을 명연설이었습니다.

 

“마이클 듀카키스의 부모는 의사와 교사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경비원과 하인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공부하였고, 나는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종교, 지역, 인종, 그리고 경험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의 진수는 그러한 다양성 속의 일치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와 나의 오솔길이 한 곳에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이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던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가지 실, 한가지 색, 한가지 천으로 짜여진 담요가 아닙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나의 유년 시절, 어머니는 우리에게 담요 한 장 마련해 주시지 못했지만, 슬퍼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어머니는 털헝겊, 실크, 방수천, 부대 자루 등, 여러 가지 천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기운찬 손놀림으로 그 조각천들을 꿰메어 훌륭한 누비 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을 상징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른바 누비 이불을 건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미국의 힘은 다양성 속에 내재한 일치성이라는 잭슨 목사의 말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는 서로 배경이 다릅니다. 형편도 다릅니다. 재능도 다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한 교회에 모아 놓으셨습니까? 이 다양성 속에서 교회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지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오히려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다양한 지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축복입니다. 저희 아이가 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공을 시키려고 배워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취미 내지는 특기를 가지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전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오케스트라에 집어 넣었습니다. New England Conservatory Prep Department 에는 국민학생, 혹은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여러 개 있습니다. 처음에 시험을 봐서 자기 수준에 맞는 오케스트라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매년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면 더 잘하는 상급 오케스트라로 올라갑니다. 같은 오케스트라에서도 누가 앞자리에 앉느냐를 가지고 경쟁을 합니다.

 

제가 오래동안 오케스트라를 따라 다니면서 배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하는 오케스트라로 올라 가면 갈수록 악기 수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국민학생들만 있는 못하는 오케스트라에는 현악기만 있습니다. 나팔이 없습니다. 위로 올라 가면서 나팔도 하나 둘 들어오고, 더 잘하는 오케스트라에는 팀파니 같은 타악기도 들어와서 Full 오케스트라가 됩니다. 그리고 잘하는 오케스트라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화음이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많은 악기들이 들어와서,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하나로 뭉쳐지고 어우러져서 가슴이 뭉클한 멋진 소리를 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자기 파트를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멋진 화음을 연출하는 오케스트라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몸에는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교회에도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좋은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지체가 많은 교회입니다.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다양한 은사가 어우러질 때에, 멋진 화음을 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형성할 때에 온전한 교회가 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보완하고 돕는 지체가 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다양한 개성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하나의 일치된 목적을 위하여 한 마음을 품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도와야 합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의 이룰 때에 아름다움이 창조됩니다. 발전이 있습니다.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도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하였습니다. 두뇌나 심장과 같이 진짜 중요한 지체들은 두개골이나 갈비뼈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교회에도 진짜 보배는 눈에 안보이게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생활의 첫번째 덕목은 겸손입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절대로 금물입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과대망상에 사로 잡히지 않습니다. 지체된 자는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푼수가 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가운데, 믿음의 분수대로,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는 귀한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