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와 마리아 ( 10:38-42)

 

오늘은 마르다의 봉사와 마리아의 헌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르다는 언니이고 마리아는 동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그들에게는 오라비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이미 죽고 나흘이 지나서 냄새가 나는 시신을 다시 살려주신 나사로 입니다 ( 11:39). 예수님은 이 가정을 각별히 사랑하시고 가까이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 11:3). 요한복음 11 5절에는 예수님이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에, 마르다는 분주하게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 준비를 하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본 마르다는 요즘 말로 열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정신 없이 힘들게 일하는데, 한가하게 앉아있는 동생을 보고 화딱지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마리아는 저렇게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있는데, 주님은 아무런 생각이 없으십니까? 제 동생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해 주세요.

 

우리 눈에도 마리아는 이기적이고 얌체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말처럼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선택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는 우리 성경에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음식을 너무 여러 가지 차리지 말고,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해도 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들을 보면,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바로 그 한가지 좋은 것을 택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육의 양식을 위하여 애쓰는 것보다 영의 양식,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악용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 때에, 나는 이 말씀에 의거해서 성경을 읽겠다고 한 쪽 구석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며 봉사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예배 시간에 음식 준비하느라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라고 적용해야 바른 적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우선 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는 예배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없이 봉사하는 사람은 마르다처럼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나만 고생해야 돼? 왜 저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해? 마르다의 이 불평은 그의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는 마르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금방 불협 화음을 일으킵니다. 심하면 교회를 안 나온다고 합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없이,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 주님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공허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 주지도 않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을 때에, 그 사람은 회의에 휩싸이게 되고, 실망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봉사에 선행되어야 합니다. 봉사는 예배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봉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르다와 같이 인간적인 불평을 하게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주한 시간 만큼 고요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살인적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 하시면서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다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 다른 사람과 불협 화음을 내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는 어떠한 헌신을 드렸을까요? 마리아의 헌신은 요한복음 12 1절로 8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살고 있던 베다니 지방에 이르셨을 때에, 마르다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바쁘게 일하였습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300 데나리온, 곧 보통 노동자가 일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값어치가 나가는 향유를 저렇게 순식간에 허비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였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기뻐 받으셨고, 마태복음 26 13절에 보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바친 기사는 사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 26:6-13, 14:3-9, 7:36-50, 12:1-8). 일반적으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행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은 다른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중에, ‘값 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라는 가사가 있는데, 향유를 드린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가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12장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 마리아였다고 말씀합니다.

 

마리아는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르다와 비교가 안 되는 것을 드렸습니다. 훨씬 더 큰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왜 나만 값 비싼 향유를 바쳐야 하나요? 왜 마르다는 자신의 옥합을 깨지 않나요? 그런 어리석은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마르다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장 귀한 것을 아낌 없이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에게 최고의 것을 아낌 없이 드렸습니다. 주님께 드리면서 아까워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독생자를 아낌 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 12:30). 최고의 것을 드리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그처럼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주님께 받은 은혜에서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생명을 살려 주셨으니,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살려 주신 사람들 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님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고 지금까지 지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헌신하라고 고린도전서 6 20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헌신의 근거는 주님이 구속하여 주신 은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희생에 빚진 자들입니다. 로마서 121절은 그러한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일생을 제물처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산 제사로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Lawrence 라는 수도사를 아십니까? James Boice 목사님의 마태복음 주석에 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17세기에 살았던 카르멜파 수도사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Nicholas Herman 이었는데, Lorrain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군대에 복무하였습니다. 그는 겨울에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보면서, 얼마 안 있으면 그 잎사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다시 달리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개종하였고, 1666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Carmelite 수도원에서 그는 Lawrence로 불리었고, 부엌에서 그릇들을 담당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처음에는 그 일을 싫어하였지만, 그는 그러한 비천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행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는 예배당에서 보다 부엌에서 더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항아리와 냄비와 물건들의 주시여, 제가 음식을 준비하며 접시를 닦는 일 가운데 성자가 되게 하소서.” 크리스챤의 삶에 대한 그의 명상들이 기록된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이라는 책은 기독교 고전이 되었습니다. Lawrence 형제는 부엌일을 하면서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매를 맞고 벌을 받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합니다. 하라는 것만 합니다. 미니멈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마음 속에 넘치는 사람은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이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inside out으로 표출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미니멈만 할까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나같은 자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목숨까지 내어 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켜 주십시오, 라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가장 귀한 옥합을 드리는 이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제 자신을 다 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헌신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