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 25:1-9)

 

출애굽기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는 성막 (tabernacle)에 관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에 성막을 짓는 내용이 두 번 반복되는데, 전반부는 “이렇게 지으라”이고, 후반부는 “그렇게 지었더라”입니다. 그 중간에 32장부터 34장까지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성막은 성경에서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오늘 본문 8절에는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어서 9절에는 장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텐트라는 뜻이지요. 27 21절에는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는 장막 (tent of meeting)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38 21절에는 성막, 곧 거룩한 장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회막, 만나는 장막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누구와 누구가 만난다는 것입니까? 모세와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각 지파 대표들이 모인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을 대표한 제사장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십계명 돌판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8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에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40절에도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에, 장막의 설계도 (blueprint)도 가지고 왔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십계명만 가지고 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은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 7: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에게는 형법이 됩니다. 율법을 어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어서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것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는 장소를 마련하셔서 구제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회막이요, 성막이요, 성소입니다. 거기서 속죄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고 죄사함을 받으며, 거기서 하나님은 은총을 힘입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거기서 거친 광야를 살아갈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막은 그리스도의 모형 (type)이었던 것입니다.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 “그리스도 안”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던 구약의 제도 속에 이미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막은 이스라엘의 진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민수기 2 17절에 보면, 회막의 위치가 나오는데, 진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했습니다. 성막이 중심에 있고,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심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성소가 중앙에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장치였습니다. 성막은 그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 14절에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였는데, 거기서 ‘거하다’라는 말이 원어로는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장막을 치신 하나님의 임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성막의 재료들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그 재료들을 만나처럼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주시면 더 거룩한 집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백성들로부터 금은동과 각종 실과 가죽과 조각목과 기름과 향과 심지어 보석까지 직접 거두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를 짓게 하셨을까요? 그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참여하는 복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바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영광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 손에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죽을 때에 결국은 놓고 가야 합니다. 공수래 공수거는 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손에 있는 보석을 성막을 짓는 일에 바치면, 제사장이 입는 에봇의 가슴에 박히는 보석이 됩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좀도 쓸지 않고 녹도 쓸지 않고 도적도 훔쳐가지 못하는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계획을 하셨지만, 주의 백성들이 드리는 재료를 통하여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상고하고자 하는 주제는 2절에 “즐거운 마음으로” 낸다는 말씀입니다: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게 내는 자에게서 너희는 받을지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5 2절은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자원함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라,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비교 의식에서 시기심으로 하다가 사단의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백성들에게 오늘 날로 말하면 건축 헌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9절에 보면,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14절에서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출애굽기 35 21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36 5절에 보니까,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성막을 짓는 재료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지고 오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드리는 것으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무릇 마음에 감동된 자들이 성막을 위하여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처럼 자원하는 예물들로 인하여 성막을 지을 재료가 넘쳤습니다.

 

빌립보서 2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같은 말씀을 새번역에 보면, “여러분 속에서 활동하셔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역들을 다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뜻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에 소원으로 심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소원을 주시고 의욕을 주시고 마음을 주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행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는 차고 넘치는 역사, 기쁨으로 감사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충만하였던 초대 교회가 그러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 32절 이하에 보면, 교인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는 나중에 바울의 선교 동역자가 된 바나바도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면, 자기의 재물이 더 이상 자기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바칠 것인가, 그런 관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의 마음으로 물질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돈을 사랑하는 탐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입니다. 회심을 강조했던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레는 “진정한 회심은 돈 지갑이 회개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를 자랑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근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구제 헌금을 모금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마게도냐 교회는 극히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연보를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고린도는 부유한 항구 도시로 교역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족한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달동네와 같은 마게도냐에서 훨씬 더 풍성한 연보가 걷혔습니다.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헌금은 헌신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은 인색한 헌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극한 가난의 고통 가운데서 넘치는 헌금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비단 물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실 때에, 시간과 은사와 온 몸과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우리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자원하여 바치는 일은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내가 드리는 것이 작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성소의 일부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사용되게 하소서, 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하늘 나라 성소에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존전에서 영원히 보전됩니다. 천국의 성소를 지어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