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도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신 여전도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밤에 시간 바뀌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년: 함대옥, 박정원, 우정희, 최태순, 김영희, 한옥주, 김유민, 주원열 (8명)

청년: 이주용, 이상엽, 한민식, 최지원, 정노아, 오영근, 정연오, 왕재원, 나예진, 김규리, 김주현, 신진실, 연희정, 조은비, 서지원, 장경수, 차유진, 김이삭, 김민선, 박선혜, 박유빈, 최혜원, 정호웅, 민승준, 정고은, 이하경, 하우석, 전재현, 김예림 민효식 (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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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을 기이히 여기심 ( 6:1-6)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고향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이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고향 사람들이 그 지혜와 권능에 놀라면서도 경멸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과 가족 사항과 직업 등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

오늘 날도 우리 주변에서 교회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에 대하여 아주 잘 안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이 교회 저 교회 다 다녀보았는데, 다 똑같아. 교회란 그냥 인간들이 모여서 목사 편하고 목사 반대편이 편짜고 싸우는 곳이야, 세상 싸움하고 한가지 다른 것은 하나님 운운하면서 싸운다는 거야, 서로를 마귀라고 부르면서 싸우는 것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교회를 잘 아는 사람일까요?

예수님을 잘 안다고 경멸하고 배척했던 고향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설픈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목수의 아들 예수만 알았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었을 때에는 제일 앞장 서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찬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요,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처럼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이 아니라, 참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6절에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 58절의 병행 구절에 보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인간을 인격체로 대우하셔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예수님은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만약 어떤 사람의 집에서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고 거기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이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amazed, marveled, wondered, astonished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날도 교회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의 불신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믿는 자들의 불신을 인하여 권능을 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믿음 없음을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로마서 8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분명히 말씀하는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지 못하는 신자들을 보고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여러 번 체험하고도 금방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이히 여기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신자들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을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 13:5),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심지어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고 불신에 빠지는 신자들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하셨던 기적을 경험하고도, 금방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이히 여기면서도, 똑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신자들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믿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을 의심하는 신자들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 주시기 않는다고 불평하는 신자를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99번의 기도 응답을 받고도, 100번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을 지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과연 나의 기도를 들으실까, 의심하는 신자를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너희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는다고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죄의식에 시달려 사는 불신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리라는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고 불뱀에 물려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이히 여기면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끝까지 거부하는 불신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나 같이 교만하고 강퍅한 죄인도 구원하셨는데, 저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단정 짓는 그 불신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면, 마귀가 처음부터 불신을 조장하는 자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의 유혹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공격합니다. 먼저 마귀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의심을 갖도록 유혹하였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마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도록 공격하였습니다. 마귀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믿음이란 마귀의 속삼임에 귀를 귀울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히브리서 13 5절과 같은 말씀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너는 쓰러질 것이다, 라는 생각을 우리 마음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믿음을 가진 성도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고린도후서 4 8절로 9절과 같은 말씀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너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믿음을 가진 성도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요한복음 10 28절 말씀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손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섭리의 손길에 인도함 받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이 생기면 우리의 과거도 해석됩니다. 지난 날에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보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현재도 해석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소망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의 증거요 상급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 인생도 다 끝난 것 같지만, 끝이 아닙니다. 여기가 내 인생의 밑바닥이다, 이제부터는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하는데도 계속 내려갑니다. 철저하게 내려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끝이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결론 짓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런 때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의 불신을 기이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또 한 곳 있습니다. 곧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을 기이히 여기셨다는 구절이나,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는 구절이나, 모두 동일한 thaumazo 라는 헬라어 단어가 쓰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좋다,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백부장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내 아래도 군사들이 있는데, 이 사람보고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보고 오리고 하면 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 8:8-9). 예수님이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8:10).    

결국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신 두 가지는 고향 사람들의 불신과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그의 믿음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불신으로 주님의 기이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처럼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