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고후 13:1-13)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이제 곧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번째 방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한 마디로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The background of this text points to a subtle threat: Judgement was imminent. If the Corinthians did not heed his first and second warnings, he would “not spare anyone” (2 Cor. 13:2) (Swindoll).

 

바울을 만나 본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외모가 약하다든지, 말이 시원치 않다든지, 하면서 바울을 약하게 보았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역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며, 여러분의 문제를 처리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처럼 온유와 겸손으로 그들을 대하였지만, 이제 3차 방문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3차 방문이 고린도 교회의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destroy) 방문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는 (build) 방문이 되도록 미리 회개하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10).

 

오늘 본문에서 두 구절을 중점적으로 상고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2절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고, 두번째는 5절의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2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전에 범죄한 사람들과 또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내가 말하려 합니다. 그것은 내가 두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했을 때에 이미 말해 둔 것이지만, 지금은 떠나 있기 때문에 다시 예고합니다. 내가 이번에 가면 범죄한 그들을 용서없이 대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해서 보냈습니다. 그처럼 사랑을 강조한 바울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당황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곽선희 목사님이 잘 설명해 놓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강해집에서 일부분을 인용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고 해서, 마귀에게까지 무한하고 죄인에게까지 무한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무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그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한하신 것이지,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그런 행악자의 앞길에 영원히 그렇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여기 엄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대로 두면 온 교회를 흐리게 만드니까요. 그러니 교회에서 내쫓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를 위해서도 그리해야 되고, 온 교회, 착한 양들, 착한 교인들을 위해서 그리하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이것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이 길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친절하고 겸손해지면 마음들이 돌아오겠는가 안 그렇습니다. 안 돌아올 사람은 안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를 회개시키지 못 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끝까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아예 버림받은 심령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오래 참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멀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제는 기대도 소원도 다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책벌하리라하는 것입니다.

 

이러게 하면서 그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여기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3). 그리스도는 약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참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해서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희생하시는 예수, 고난당하시는 예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영광의 예수, 심판주 되시는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부활하셨고 영광을 받으셨고 장차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이 장차는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다, 하는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처리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강할 것이다, 항상 참기만 하고, 항상 용서만 하고, 항상 기다리기만 할 줄 아느냐, 아니다, 그리스도가 심판주되신 것처럼 그를 의지하여 나도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용 끝).

 

우리는 사랑과 공의를 잘못 적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은 개인적인 관계에 적용해야 하고, 공의는 공적인 관계에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은 공의와 심판의 원리입니다. ‘오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보복을 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은 보복을 정당화하는 데 비해서,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예수님을 율법을 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양자 모두 개인적인 보복은 금하지만, 공동체의 공의는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율법도 개인적 보복을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공의는 어떻게 충족된다는 말입니까? 복수는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보수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32:35). 여기서 보수라고 번역된 나캄은 복수 혹은 보복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다. 시편 94편은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직접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대신 복수는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례로, 사울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니다가, 어느 날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의 몸에 손대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사울)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2). 복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다윗의 신앙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보복은 구약에서도 금하고 신약에서도 금합니다. 로마서 12 19절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반면에 신약에서도 공동체에서는 공의를 시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 15절로 17절에서, 교회의 권면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더 이상 교회의 일원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 20절에 보면, 바울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징계를 내린 목적은 저희로 더 이상 훼방하지 말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 13절에도 음행하는 자를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으셨습니다. 공동체에서는 공의가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용납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해치는 자는 주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문답집에 보면, 교회의 참된 표지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권징이라는 말 뜻을 모릅니다. 그래서 discipline이라고 해석해 주면, 금방 이해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주신 권위로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권징하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주님을 대신해서 공의의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 5절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도인지, 의심했다는 뜻입니다.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도록 계속해서 교인들을 충동하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는 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시험을 쳤습니까? 저는 지금도 학기말 시험을 쳐야 하는데, 한 학기 내내 수업도 못 들어가고, 무엇을 배웠는지,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악몽에 가끔 시달립니다. 오랫동안 시험의 스트레스에 살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치룬 시험에는 학력 고사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체력장 시험도 있었습니다. 운전 면허 시험도 있었습니다. 또 피 검사, 눈 검사, 심전도 테스트 같은 여러 가지 physical exams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시험은 spiritual test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test 혹은 exam,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크리스챤인가, 아니면 가짜, 짝퉁 크리스챤인가?

 

여러분 마켓에서 100불짜리 지폐를 내면, casher가 매직 펜으로 지폐에 줄을 긋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위조 지폐를 분별하는 테스트라고 합니다. 매직 펜의 색이 그대로 있으면 진짜이고, 어둡게 변하면 위조라고 합니다.

 

5절 말씀은 진짜 크리스챤과 가짜 크리스챤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진짜 크리스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안 계시면, 아무리 경건의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가짜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이 아시고, 나 자신이 압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 테스트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받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Abraham Shanklin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Is Jesus Christ in me? If Christ is in me, then I am in him. Salvation is not Christ upon our lips, but Christ in our hearts. It is Christ in you, living and reigning in you as your Lord and Savior, which is the hope of glory (Col. 1:27).

 

Is Jesus Christ King upon the throne of my heart? If the Son of God is my Savior, he is also my Lord. Faith in Christ is giving up the rule of your life to him (Matt. 16:25). If I belong to Christ, I give up and lose my life to him willingly. If my faith in Christ is genuine, if I am born of God, then Christ is what I desire and seek (Psa. 17:15; 27:4; Phil. 3:7-14); my heart’s great ambition is to be like him and with him forever.

 

예수님은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할 때에, 자신의 욕심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함께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합니다. 말씀과 성령이 충만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고,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보좌에 좌정하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test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진짜 크리스챤임을 확증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크리스챤들이 모인 우리 교회에 성령의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