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중에 드린 서원 (삼상 1:1-18)

 

히브리 성경에 보면, 사사기와 사무엘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사기와 사무엘서는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는 우리 자녀들에게나 주일학교에 가르치기 힘들 정도로 극악무도한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암흑 시대였고,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21:25)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는 인물을 보내셨습니다. 사무엘이라는 구원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사울왕과 다윗왕을 사무엘의 손으로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왕중왕과 대제사장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이 그러한 사무엘을 산지에 사는 시골 여인의 고통의 기도와 서원을 통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한나라는 여인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도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인력이 곧 부와 권력의 기반이었습니다. 시편 127편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3-5). 사회 보장제도가 없던 당시에 자식들은 노후 대책이기도 했습니다.

 

Women who bore a lot of children were, therefore, treated with honor. They were heroes. Women who were unable to bear children felt useless; they experienced shame rather than honor and were looked on with pity rather than respect. In the Bible, barrenness is an effective metaphor of hopelessness. There is no foreseeable future. There is no human power to invent a future.

 

Think of this from Hannah’s perspective: in a culture that puts all of a woman’s significance and security in her children, she can’t have kids! Practically speaking, she has no significance, no life, no hope! (Christ-centered exposition).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합니다.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C. S. LewisThe Problem of Pain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다니엘 기도회 강사님들 가운데, 한국에 한 명 밖에 없는 조로증을 앓는 아들을 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처음에는 why 만을 가지고 씨름하였지만, 나중에는 for what 으로 기도를 바꾸셨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무엇일까를 찾는 가운데, 전 세계의 조로증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고통에도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고통과 서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한나의 이름 뜻은 “favoured”입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부인의 이름은 브닌나 (Peninnah)인데, 그 이름의 뜻은 “fruitful” 이었습니다. 브닌나는 비록 한나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녀에게는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6절에 보면,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동하여 (provoke) 번민케 (irritate)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한나는 브닌나로 인해서 울고 먹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간절한 소망, 곧 자식을 갖는 것은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절과 6절은 “여호와께서 한나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두 번이나 말씀합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12절에 보니까, 오래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목이 다 쉰 것 같습니다. 13절에 보니까,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까, 얼굴이 빨개졌던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자기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통함과 슬픔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심정을 토하며 기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울며 통곡하며 괴로워하며 목이 다 쉬도록 오래 기도하였습니다.

 

한나는 그처럼 간곡히 기도하는 가운데 서원을 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1).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달라는 단순한 바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는 승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던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구하는 기도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한나의 고통 중에 드린 서원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다니엘 기도회 강사님들 중에 아이티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커리어 우먼이셨습니다. 유엔 직원으로 아이티에 나가서 구호 활동을 하였는데,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아이티의 길거리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예수를 전하는 선교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다가 젊은 시절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을 맡겼던 자기의 친 자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 사무소에서 소년 소녀 가장으로 보조를 받아서 연명하는 극빈자가 되어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아이티의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며 선교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식들은 밥을 굶으며, 우리에게는 부모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아이티 선교에 전재산을 다 바쳤기 때문에, 자기 아이들에게 방을 얻어줄 돈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새벽에 고통 중에 통곡하며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순교를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피를 뿌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자식들을 살려주십시오. 그 순간 퍼뜩 스치는 깨우침이 있었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이 기도를 받으시려고,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구나. 하나님은 선교사님이 고통 중에 드린 서원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앙의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32살까지 그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쳤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좌절하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며, 탕자와 같은 아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6세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7세부터 어떤 여인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세 때부터 9년 동안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탐닉하였습니다. 29세가 되었을 때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속이고 아프리카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세상적인 출세와 부귀영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을 찾아서 이태리로 온 모니카가 밀라노의 한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슬프게 우니까, 그 교회의 암브로즈 목사님이 사연을 물었습니다. 모니카는 "제 아들이 죄악에 빠졌습니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때에 암브로즈는 모니카를 위로하면서 아주 유명한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부인이여!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엘리 제사장이 원통한 마음을 토하며 기도하던 한나에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한나의 기도는 아직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얼굴에 다시는 수색 (슬픈 기색)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막을 떠났습니다.

 

지난 다니엘 기도회의 마지막 강사는 찬양 사역자였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사랑해주고 행복을 주었던 남편을 30대에 사별하였습니다. 남편이 말기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에, 그녀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찬양 사역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남편을 살려 주신다는 싸인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신 남편과 함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찬양 사역자로서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외치면서 찬양을 인도합니다. 죽을 남편을 살려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을 돌아보시고 고통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Hannah’s story teaches us that God cares for people that the world no longer cares for. Many of us may feel like the story of our lives has been a gigantic failure. We have not accomplished what we set out to accomplish. We are still childless. In times like this, we need the faith of Hannah.

 

We need to be reminded that God cares for us and has offered Himself. God cares for the outcast. He gives Himself to the broken. There is no greater consolation for those who feel that the world has cast them away. Let us run to the cross and find there the love of God that pursues each of us. God has not forsaken us but desires to draw us back to a relationship with Him. No matter our situation, we can say with Hannah, “There is no rock like our God!” (Christ-centered exposition).

 

마가복음 435절 이하에서는 큰 광풍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제자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두려워하였던 반면에, 예수님은 그 와중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기사는 오직 한 곳, 곧 폭풍에 흔들리는 배 속에서 주무셨다는 기록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니이까? NIV 성경에 보면, Dont you care if we drown”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care 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배에 들어오는 물을 보면서,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의 순간에 그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지만, 주님은 평안히 주무시고 계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풍랑을 다스리신 후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풍랑은 분명 예수님이 제자 훈련의 일환으로 허락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강하게 키우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앞길에는 많은 풍랑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거대한 풍랑을 통과한 경험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큰 풍랑을 경험한 사람은 왠 만한 풍랑에는 자신 있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가장 다급하고 큰 소리로 주님을 흔들어 깨운 것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Dont you care? 그러나 광풍을 통과하는 제자 훈련을 마친 베드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는 장성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5 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권고하심이라. NIV 성경으로 보면, 베드로가 He cares for you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 가운데 처하여,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주님의 못박히신 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어찌 잊겠는가, 내가 너를 care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때에 응답하실 것이며, 구원의 때에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 자녀를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