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찬양 (삼상 2:1-10)

 

한나는 고통 중에 서원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나의 찬양 기도문인데,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한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두번째로, 한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전 (reversal)을 찬양하였습니다.  

 

첫째로, 한나는 찬양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감사 기도문입니다. 1절에, 하나님이 자신의 뿔을 높여 주셨다는 감사는 코뿔소를 연상시킵니다. 코뿔소의 코는 뾰족한 창과 같은 공격 무기입니다. 코뿔소가 상대를 뿔로 찔러서 쓰러뜨린 후에, 피 묻은 뿔을 높이 쳐드는 승리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다는 것도 사자의 포효를 연상시키는 동물적인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 곧 구원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나의 감사에는 사무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초점을 맞추고 감사합니다. 한나도 자식이 없어서 애통하며 기도할 때에는 자식이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난 후에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한나의 기쁨은 사무엘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우리는 도움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됩니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에게 최고의 가치는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최고의 가치는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고 야고보서 117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오늘 본문 6절과 7절에서 인간의 모든 생사회복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한나는 4절로 5절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으키시는 역전 (reversal)의 예들을 듭니다. 먼저 4절은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 이르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나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또한 자랑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다윗에게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사울왕도 용사였습니다. 신장이 장대하여서, 다른 사람들의 키는 사울의 어깨 정도 밖에 안되었습니다 (삼상 9:2). 그러나 사울왕은 길보아 산에서 전사합니다. 반면에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 가장 어린 자였지만, 다윗은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삼하 22:49).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으키시는 역전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5절에 보면,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나발이라는 부자가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인데, 그는 이름처럼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는 거부였습니다.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서 피난살이를 할 때에, 600명의 소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발의 가축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든든한 담이 되어주어서 가축이 상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었습니다. 이제 양털을 깎는 날이 되었습니다. 농사로 말하자면, 추수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열 명의 소년을 나발에게 보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잘 지켜 주었으니까, 소득의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과 그 소년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수고비를 좀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발이 말하기를,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떠돌아다니는 거지 왕초같은 다윗에게 줄 것이 어디 있냐, 국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해서, 소년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려고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급히 달려나가서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내 남편이 그 이름처럼 크게 미련한 사람입니다. 제가 예물을 드릴테니까, 저를 보아서 살려주십시오.

 

그러면서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건포도와 볶은 곡식과 무화과 등등 엄청난 음식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리던 자들이 다시 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나발은 그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에 떨다가 열흘 후에 죽습니다. 나발은 자신의 재물로 인해서 교만하고 오만해졌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5절 후반부에 보면,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한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던 한나는 사무엘을 시작으로 여섯 명을 낳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불임 여성들이 중요 인물로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자식인 이삭의 부인 리브가도 불임 여성이었습니다. 창세기 2521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치 못하므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도 자식이 없어서 괴로워했습니다 (29:31). 그래서 창세기 301절에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 레아를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기를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도 불임 여성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불임 여성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습니다. 불임 여성보다 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이지요.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가장 궁극적인 실례인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8절은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우리는 그 최고의 예를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리에 내려가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 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에, 곧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Kyrios입니다. 이 단어는 신적인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기독교인들도 Kyrios Kaiser (Caeser is Lord, 시이저는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Jesus is Lord 라고 고백할 때에, 화형을 당하던지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에서는 Adonai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my Lord 라는 뜻인데,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 Jehovah (여호와)가 나올 때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에, Adonai 라고 읽었습니다. Adonai도 신적인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마는 예수님이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셨을 때에, “my Lord, my God”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Lord라는 칭호를 주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Lord라고 시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모든 역전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upside down 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질서가 upside down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upside down, 뒤집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30여년 전에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에, 신약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요즘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간증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튜브로 그 목사님이 한국의 어떤 교회에서 간증한 것을 띄엄 띄엄 보았습니다. 왜 띄엄 띄엄 보았냐 하면, 그런 간증들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그 목사님이 한참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커튼을 확 제치며 왜 오늘은 이렇게 늦잠을 자느냐고 깨우는 바람에, 천국 환상이 아쉽게 끝났다고 합니다.

 

그 분이 본 천국에는 12반열이 있는데, 테레사 수녀가 제4반열에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동영상 밑에 댓글을 달았는데, 믿을 만한 증인인 안젤리카는 테레사를 지옥에서 보았다고 하므로, 이 목사의 간증은 엉터리라고 비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증언 가운데 공감이 가는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보다도 농어촌에서 수고한 목회자들이 천국에서 더 큰 인정을 받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천국에서 역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John Stott 목사님은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밖에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 없으며, 항변할 것도 없고, 하늘의 호의를 살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른 곳에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하나, 마음에는 교만과 자기 의에 가득 차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축복 대신 저주를 퍼 부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 23). 자만심에 가득 찬 그들에게 예수님은 천국 대신 지옥을 약속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냐?

 

반대로 천국을 약속 받은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나는 주님께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천국 백성의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은 불의하다 하시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는 의롭다고 하십니다 ( 18:9-14).

 

어떤 사람이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읽다가, 바리새인이 옆에 서 있는 세리를 가리키면서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 저는 이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은 바리새인과 똑 같이 자기 의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령이 부자인 사람, 곧 교만한 자인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자만하는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열심당원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비록 세리와 창기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면 천국에서 주님이 맞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8 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서열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서열까지도 미리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웅변적인 실물 교육을 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한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의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보아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진실로, 결단코,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얼마나 강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이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서열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궁금해하는 천국의 서열에 대하여, 천국의 서열은 겸손 순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싶거든, 어린 아이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9 35절에서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이 타락한 세상의 upside down입니다. 하나님은 upside down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거꾸로 살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upside down해야 합니다. 일례로, 잠언 39절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죄성에 물든 인간은 반대로 찌꺼기를 드리는 거지요. 그처럼 거꾸로 된 것들을 모두 upside down, 뒤집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 풍속 (ways of the world, 2:2)을 쫓는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합니다. 죄악된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라고 하였으므로 ( 4:4),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 4:8). 꺼꾸로 된 것들을 하나 하나 모두 upside down, 뒤집어야 합니다.

 

그처럼 내가 바뀌면, 주변이 바뀝니다. 내가 바뀜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친구와 이웃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물구 나무 서서 거꾸로 살아왔다면, 이제 upside down,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이끄는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