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법궤 (삼상 4:1-22)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 (언약궤, 증거궤)를 빼앗긴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궤는: The ark was the most important piece of furniture in the tabernacle and resided in the Holy of Holies. In the ark were the two tablets of the law, and on it was the golden “mercy seat” where God’s glorious presence dwelt. This was the throne of God from which He spoke to His people. (Wiersbe).

 

여호와의 법궤에는 위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게 하자, 요단강이 멈추어 섰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에서 빼앗은 법궤를 자신들의 다곤 (Dagon) 신상에 안치하자, 다곤 신상이 넘어지고 목과 손목이 부러지는 일이 일어났고, 블레셋 땅에 독종 (tumor)의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블레셋은 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한 법궤의 위력은 할리우드 영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Does anyone remember Indiana Jones and Raiders of the Lost Ark (1981)? In that movie the ark is described as a source of unrivalled power that Hitler and the Nazis want to co-opt for themselves. Once discovered, the “wrath” and the “power” of Israel’s God would become a weapon for the Nazi war machine. Marcus Brody summarizes the ominous stakes for the one who holds the power of the religious artifact: “An army which carries the ark before it… is invincible.” (Christ-centered exposition).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장로들이 대책 회의를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그리고 대책을 수립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3).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살륙이 심히 커서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 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0-11). 하나님의 궤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고 있던 (13) 엘리는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18). 비느하스의 아내는 출산하며 죽으면서, 신생아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습니다. Ichabod means “Where is glory?” Her reasoning is: “The Glory has departed from Israel” (21-22).  

 

첫 전투에서 패한 후에 이스라엘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명한 것처럼, 우상을 제하고 회개함으로 여호와께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을 것입니다. Instead of searching their hearts and confessing their sins, the people decided to imitate Moses and Joshua and take the ark of the covenant into the battle with them (See Num, 10:33-36; Josh. 3-4 and 6). But this approach was merely “using God” to accomplish their own purposes. God will not be “used” just to make sinful people achieve their own selfish purposes. God’s promise is, “Them that honour me I will honour.” (1 Sam. 2:30) (Wiersbe).

 

Tim Chester 목사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하나님을 웨이터로 취급하는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It is possible for us to treat God like a waiter in a restaurant. You sit with your friends, enjoying a meal, talking together, and most of the time you ignore the waiter. Then when you want something you call him over. “Can we order dessert now?” “Can you bring some more water?” “Can we have the bill?” The waiter does not sit at the table with you. He is not part of your evening. You just call him over when you need him. We can treat God like that. He is not part of our lives. But when we need him, we call him over to help. We do not take him seriously.

 

히브리어로 영광과 (glory) 무게는 (weight) 어근이 같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It is not hard to end up seeing God in this un-weighty way; to think, perhaps unconsciously, that by coming to church each Sunday, reading the Bible each day and giving a portion of our income, we are doing our bit for God. And in return we expect God to save us from hell and help out from time to time in life, ensuring that we are comfortable or happy or whatever it is that we wish to use him to supply.

 

신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면 귀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죽을 때 어떤 예식을 행하면 천국에 간다든지, 죽은 다음에도 어떤 예식을 행하면 연옥에 있던 조상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든지, 하는 등의 생각은 법궤만 전쟁터에 있으면 승리한다는 생각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미가는 어머니 돈을 훔쳤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누가 훔쳤는지 모르지만, 천벌을 받으라고 저주하였습니다. 미가는 저주가 두려워서 어머니에게 자백을 하고 훔친 돈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돈을 훔친 아들을 꾸짖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들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은 이백을 은장색에게 주면서, 그 돈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말합니다.

 

신상을 얻은 미가는 자기 집에 신당을 만들었습니다. 신당에 신상을 세우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의복이었습니다. 드라빔은 점 치는 일에 쓰는 우상이었습니다. 야곱을 따라서 나오던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드라빔을 훔쳤다는 기사가 창세기에 나오고, 스가랴서 10 2절에 보면, 드라빔은 허탄한 것을 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가는 신당에 신상을 세우고, 제구를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채용해서, 완벽한 신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만족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17:13).

 

팀 켈러 목사님은 오늘 날도 성행하고 있는 미가의 종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 나에 대한 종교이며, 내 생각과 내가 선호하는 것에 관한 종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길들여서 조종하려는 종교이며, 우리 마음에 편한 이미지로 하나님을 뜯어 고치는 종교이다. 그처럼 사람이 만든 종교의 비극은 무엇인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삶을 바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신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매일 성경을 강론할 때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의 능력을 흉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 중에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방자해서 악귀를 좇아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악귀에게 제압당하고 벗은 몸으로 도망가는 망신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악귀 들린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똑같이 했는데, 안 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날마다 거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강론할 때에, 그에게 악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를 멀리 하고, 그래서 모양 뿐인 크리스챤이 된다면, 우리는 마귀에게 조롱당하고, 무장 해제 당하고, 농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교인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예수의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 만이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죄악된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의 감화는 소멸되고, 성령의 지배는 약화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계속 유지하려면, 그처럼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가까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몸이 정결한 성령의 전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 살랐다고 했습니다. 마술사들에게 마술책은 밥줄이었습니다. 그들은 밥줄까지 포기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22절에 보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 죄의 모양은 없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죄와 동거하실 수 없습니다. 창세기 6 2절에 보면, 사람이 죄악된 육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신은 떠나가십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가득 차 있을 때에, 우리의 심령은 성령의 전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한 이유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죄악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91절로3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이가봇. 제사장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성소에서 떠났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마술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다시 임하시게 하려면, 법궤를 들고 다닐 것이 아니라, 우상을 제하고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씀을 원어를 직역하면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을 구약의 성막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셨습니다. 성막은 회막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성막 혹은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거대한 텐트촌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제나 성소로 나아와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소와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그림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성소에 거하셨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의 제사를 받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출애굽기 40 35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 모세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1 15절에“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렀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서 요한은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자신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골로새서 2 9절에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 자신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셨습니다. 요한복음 12 23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침 뱉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영화로운 것, 영광을 얻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혹한 형틀에서 죽는 것에 대하여 영광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빌립보서 2장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먼저 주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누구에게 영광을 주시는가? 하나님은 그 영광을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주십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세상의 모든 영광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학벌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그 밖에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여기며 얻으려고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덧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영광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기피하는 것은 장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 세상의 영광을 구하라”는 사단의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차 주님이 주실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달게 지는 복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오늘날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산 제물로, 내 삶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영광입니다, 혹은 가문의 영광입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어떨 때에 그런 말을 씁니까? 세상에서 출세하였을 때에, 과거 급제하였을 때에, 큰 상을 받았을 때에, 그런 말을 씁니다. 여러분은 언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언제 영광을 느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은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영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영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장 큰 영광은 순교자의 영광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취하신 영광입니다.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늘의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