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법궤 (삼상 6:1-18)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법궤를 아스돗의 다곤 신당에 갖다 놓았습니다. 일종의 전리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패배한 나라의 신상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상 곁에 두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이 다른 신들을 이겼다는 전시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승전의 메시지인 동시에, 장차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아스돗의 다곤 신상은 여호와의 법궤 앞에 엎드러지고 맙니다. 다시 세워 놓았더니,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서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독종 (종기, 악성 종양)이 돌고, 온 땅에 쥐가 들끓어 농사를 망치게 했습니다. 독종을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tumor로 번역했는데, King James emerods (치질)로 번역하였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견디다 못하여 법궤를 가드로 보냅니다. 그러나 가드에도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더하사 독종이 나게 하셨습니다. 가드 사람들은 다시 법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에그론에도 사망의 환난이 임하였습니다. 511절로 12절에 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장으로 넘어오면,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대책을 묻습니다. 그들은 속건제물 (guilt offering)과 함께 법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속건제는 물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물에 손해를 입혔다든지, 아니면 이웃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 속죄의 제물과 함께 손해를 입힌 것의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불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성물을 빼앗아 온 것에 대한 속죄와 더불어 배상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대표적인 다섯 도시의 다섯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형상 다섯과 금쥐 형상 다섯을 속건 제물로 법궤와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종의 테스트를 하였습니다. 7절로 9절이 그 테스트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겉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벳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그 손이 아니라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무슨 말입니까? 멍에를 한 번도 안 메어본 소가 어찌 한번도 끌어본 적이 없는 새 수레를 끌고 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막 새끼를 낳아서 아직 젖이 나오고 있는 암소가 어찌 새끼들을 뒤에 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암소가 어찌 방향을 알고 제 스스로 15 킬로미터 떨어진 벳세메스라는 곳을 찾아 가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가능성 0%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암소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 벳세메스로 간다면, 이 모든 재앙은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가 벌로 내린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벳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12).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이스라엘로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 암소들에 대하여 몇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 암소들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법궤는 아무나 옮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들은 자기들 어깨에 멍에를 메고 법궤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도록 선택을 받은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도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입니다.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기에는 몹시 지쳐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꾸 쓰러지셨습니다. 전승에 의하며 열 네번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길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건장한 사람을 하나 택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처럼 졸지에 주님의 십자가를 넘겨받은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구레네는 이집트 서쪽에 오늘날 리비아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구레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사도행전 2 10절에도 오순절에 구레네에서 온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구레네 사람 시몬은 아마도 유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것입니다. 마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군인의 지명을 받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이 루포의 아비였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16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미, 곧 구레네 시몬의 부인을 자기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시몬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아들과 온 가족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시몬은 주님과 골고다 언덕까지 동행하면서, 또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크게 감명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붙잡혀서 처음 보는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억울하기도 하고 분통터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수많은 인파 가운데 하필이면 왜 내가 걸렸는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똑같은 일을 당하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채찍질로 갈기갈기 찢겨진 주님의 어깨로 지시던 피 묻은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그의 생애에 가장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간은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하여 영원한 영광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처럼 복된 일입니다.


둘째로, 법궤를 옮긴 암소들은 젖먹이 새끼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암소들이 울면서 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라는 단어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 59절로 62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또 다른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도 정말 너무한 것이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아버지 장례식 마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데, 그것 마저 안된다고 하시면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데, 그것 마저 안된다고 하시면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에, 그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 사람들이 한 말을 자세히 보면, “먼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 하소서.” 그들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식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젖을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다.

  
창세기 12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살아온 땅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도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장망성은 이사야 19 18절에 나오는 단어인데, 장차 망할 성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the city of destruction입니다. The Pilgrims Progress, 순례자의 여정은 the city of destruction을 떠나서 the city of God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법궤를 옮긴 암소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곁길로 새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목표 지점인 벳세메스로 곧바로 나아갔습니다. 두 마리의 암소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빌립보서 3 12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인가? 바울은 예수님께 잡혔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께 잡혔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처럼 바울을 체포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목표로 삼고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바울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이 바울을 체포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을 복음 전파에 쓰시기 위해서 붙잡으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려고 잡으셨습니다 ( 11:13, 2:8).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보내시려고 부르셨습니다 ( 15:20-21). 주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 9:15).


우리를 택하여 부르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사명이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입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이고, 목적은 하나,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함입니다. 몸의 지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목적은 하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달리기의 푯대는 하나입니다. 모든 선수들이 바라보고 뛰는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 13절에서 “오직 한 일”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삽니다.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은 희미하게 퇴색되고 맙니다. 많은 일들 가운데 부르신 목표가 묻히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한 일을 좇아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넷째로, 법궤를 운반한 암소들은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 번제로 바쳐졌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암소들에게 수고하였다고 여물을 주었고, 여물을 먹은 암소들은 꿀잠을 잤더라가 아니었습니다. 암소들은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도 번제로 불살라 온전히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등에 지워준 장작 더미를 메고 모리아 산에 올라간 후에, 번제로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대속의 숫양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정에서 바쳤습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모리아 산이 골고다 언덕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에서 독생자 이삭을 바친 사건은 하나님이 골고다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갈보리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정에서 예수님의 순종을 보았습니다. 이삭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나무를 등에 지고 모리아산을 올라가는 이삭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주님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결박당하여 아버지의 칼을 기다리는 이삭의 모습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정에서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아버지의 마음을 체험하였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의 죽음과 대속의 양을 통해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부활을 경험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떠나는 시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바치는 시험은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번제로 바쳐지는 삶을 원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12:1)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1 29절에서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쉼을 약속하시면서 멍에를 벗겨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멍에를 벗겨주리라, 그늘에서 편히 쉬어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목수이셨습니다. 실제로 멍에를 많이 만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어깨에 잘 맞는 멍에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요 직무입니다. 그리고 멍에란 혼자 메는 것이 아닙니다.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나란히 메고 밭을 가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맞는 멍에를 지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고 동행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 주님이 메어주시는 멍에는 결코 짐이 아닙니다. 무거운 속박이 아닙니다. 주님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메고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보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이 시키는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주님이 명하는 속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과 멍에를 같이하고 동행하는 자에게는 환경을 초월하는 안식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합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주님과 멍에를 같이하며 동행하는 자에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폭풍을 무서워하지 않고,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산더미 같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말씀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