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림과 실패를 통하여 (삼상 9:1-10)

 

하나님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꼭 드는 조건을 가진 사울을 세우십니다. 사울은 가문 좋고 키 크고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외모를 갖춘 사울은 장차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중심을 보시고 택하신 왕은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시는 일은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리는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잃어버린 donkeys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사울의 사환이 하나님의 선견자 사무엘을 찾아가서 나귀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자고 해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고,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0:1).

 

그처럼 하나님은 잃어버림을 통해서 부르실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상실과 떠남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잃어버렸지만 다시 찾았고 (11:19),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요셉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잃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모세도 동족을 사랑하는 의협심에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가서, 애굽의 왕자의 지위와 보화를 잃어버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민족의 영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잃어버림을 통해서 부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도 잃어버림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사업에 망해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빈 손들고 주 앞에 나아오게 되었다는 간증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건강을 되찾고 주의 종이 되었다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잃어버림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실패를 통하여 부르십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았다면, 선견자 (seer) 사무엘에게 암나귀들의 소재를 물으러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의 목표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실패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지만, 어느 날은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도 그 실패의 순간에 주님을 만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지요?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잃어버림과 실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벧전 2:9). 우리를 택하고 부르셔서, 영원한 왕국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 등등을 찾아 헤메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실패함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더 높고 큰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아 헤메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노회 개회 예배에서 노회장 목사님이 골로새서 122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골로새서 122절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교회, 큰 목회, 수적인 부흥 등등, 우리의 의와 자랑을 추구하는 마음 중심을 가지고 목회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찾아 헤메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실패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하나님의 높고 크신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8:29).  

 

It was a donkey chase that propelled Saul into a place where God designated him to be. You see, Saul found himself in a desperate situation – a place where he had lost hope – he and his servants could not find his father’s donkeys and he was prepared to give up out of desperation and go back home empty-handed!

 

Have you ever felt that way? So desperate that you thought of giving up; letting go; go home empty-handed and just count your losses? At this point in our lives, it seems like we’re in an emergency situation. But I have good news for you… sometimes… this is RIGHT where God needs you to be!

 

How often has this been the case with us? We are living out God’s plan but entirely unaware that our destiny is just around the corner! You may just ‘think’ you’re chasing donkeys –but you just may be on track to chase your destiny in Him! (Kevin Taylor)

 

성경에서 잃어버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진 인물로 룻을 들 수 있습니다. 룻은 남편을 잃었지만, 바로 그 잃어버림을 통하여 다윗왕과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은 에스더와 함께 성경의 한 책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달리 룻은 왕비가 아니었습니다. 룻은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성경책들이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남편을 잃은 과부요, 가난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본래 모압 여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이 기근을 피해서 모압 땅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룻은 그 집안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십 년쯤 지나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만 죽은 것이 아니라, 시아버지도 죽었고, 시동생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는 과부만 세 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대 땅에 형편이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가는 길에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각각 네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 그동안 내 아들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고맙고, 또 나에게 잘 대해주어서 고맙다, 새로 남편을 얻어서 잘 살기를 바란다.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붙잡고 따르며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장사될 것입니다” (1:16-17).

 

왜 룻이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이유를 알기 힘듭니다. 평소에 시어머니 나오미의 사랑와 배려에 감동하였고, 평소에 시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본받고 싶었으며, 천성도 착하고 선해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부양하려고 했나 보다, 그 정도로 추측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룻을 먼저 택하셨기 때문에, 룻이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룻을 택하셨기 때문에, 룻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온 룻은 과연 어떠한 생활을 하였습니까? 아무런 생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추수꾼이 지나가고 난 자리를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어서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추수할 때에 뒤에 떨어지는 이삭을 줍지 말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룻은 극빈자로서 남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룻이 좀 잘못 선택한 것 같지 않습니까? 동서 오르바처럼 다시 어미 집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만나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시어머니를 따라온 룻에게 기다리는 것은 배고픔과 고달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룻기 2 3절에 보면, 룻이 우연히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4절에 보면, ‘마침보아스가 밭에 이르러서 룻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호의를 베풉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2:10)

 

보아스가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11-12).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서 은혜를 입은 것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이니라고 말합니다 (2:20).

 

여기서 기업을 무른다고 할 때에, 기업은 영어로 inheritance로 되어있고, 무른다는 것은 redeem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잃어버린 유산을 값 주고 다시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는데, 그 미망인이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유산으로 받은 땅을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다시 값 주고 사서 돌려주고, 그 미망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준 다음, 그 땅의 명의를 그 아들 앞으로 돌려주는 제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망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사회 보장 제도였습니다.

 

그처럼 기업을 물러주는 친족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불렀는데, 영어로는 kinsman redeemer로 번역되었습니다. 친척 구원자입니다. 친척을 곤경으로부터 구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고엘이 되어 주었습니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삭을 줍던 이방 여인 룻에게서 다윗 왕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룻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엘 (redeemer)을 통하여 구속하시는 장구한 구원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룻은 일찍 남편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이삭을 줍는 이방 여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메시야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녀는 선택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삶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삶이었습니다. 룻기가 보여주는 진리는, 룻처럼 살아 남기 위하여 하루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 왕조와 메시야를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축복된 삶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룻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결코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누가 일찍 남편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이삭을 줍는 삶을 동경하겠습니까? 룻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자이신 메시야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나의 삶은 내가 바라던 삶이 결코 아니라고 슬퍼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남의 나라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모습이 나의 자화상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룻기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믿음의 후손들이 열매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유는 남편을 오래 살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유는 먹고 살 걱정 안하게 해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스바냐 3 17절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유는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왕비 에스더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행하고 가난한 이방 여인 룻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평범하고 이름 없는 여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축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러 주었듯이,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며, 당신의 신음 소리에도 귀 기울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의 VIP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구속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귀한 만남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축복된 삶입니다. 룻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녀의 삶 속에서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물러줄 구속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속자를 허락하심으로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