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요나단 (삼상 18:1-12)

        다윗과 요나단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사람들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에,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시기 질투가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다윗보다 요나단의 믿음과 사랑이 더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인격을 파괴합니다. 유대인들의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네가 해달라는 대로 소원을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너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너에게 주는 것의 곱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자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친한 친구라고 해도 시기와 질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여자는 고민 끝에 드디어 자기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친구에게는 두 눈을 다 멀게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나보다 곱절로 축복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보다 곱절로 저주받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기꺼이 나도 저주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기요 질투입니다. 얼마나 파괴적입니까?

        야고보서 3 15절에 보면, 독한 시기는 마귀적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 처음에는 부러워합니다. 나도 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면 좋겠는데, 비교 의식은 질투로 발전합니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질투와 미움은 살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살인 사건의 20%가 그 원인이 질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마귀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귀적인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선택되는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저는 도저히 이런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면서 숨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 전쟁을 치르면서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주 추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에,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의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7). 그 비교로부터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질투는 결국 사울 왕의 삶을 파괴시켰습니다. 점점 지혜가 없어지고 능력도 상실하면서 무력한 왕이 되어 갑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자폭해 버리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기 일생을 끝내고 맙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에게 임한 질투의 배후에는 악령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내릴 때마다, 그는 다윗을 향하여 단창을 던져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시기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새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전혀 질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용사였고 전쟁에도 능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해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위를 다윗에게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23 17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사울 왕이 볼 때에 이런 요나단은 정말 정신나간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패역부도의 계집 (공동번역: 몹쓸 화냥년)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고 말합니다 (삼상 20:30-31). 한마디로 이 바보같은 놈아 정신차려라, 하는 말입니다.  

        요나단은 과연 바보였을까요? 그래서 다윗에게 네가 왕이 먼저 되라고 양보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단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윗을 도왔던 것은 단순히 다윗을 사랑해서 만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동성 연애를 하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의식하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하는 말을 보면, 구구절절이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 20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요나단은 인간적인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너와 나 사이에 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였습니다.

마틴 부버라는 유태인 철학자의 I and Thou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를 두가지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 (Ich-Es)입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일종의 물건으로 대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면 서로 버리는 관계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헤어집니다.

둘째는 나와 너의 관계 (Ich-Du) 입니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사람으로, 인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생명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와 너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로 인해 나와 너의 관계는 쉽게 깨어집니다.

따라서 나와 너의 관계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깊게 하고, 영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할 어떤 중매자가 필요한 데 이를 영원한 너 (The Eternal Thou) 라고 표현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은 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권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왕도 안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왕권을 존중하였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 사울 왕의 잘못을 보면서, 오히려 다윗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일례로, 사무엘상 20 12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일이나 모레 이맘 때에 부친을 살펴서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네게 보내어 알게 하지 않겠느냐?

이어지는 13절에 보면, 그러나 만일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는데도, 내가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요나단이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지, 살리려고 하는지, 상황을 판단해서 미리 알려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이런 부탁을 하였습니다: 너는 나의 사는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 (kindness)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인자 (kindness)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삼상 20:14-15).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언약하였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삼상 20:42).

그래서 나중에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사무엘하 9 3절에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여기 은총이라는 단어는 hesed인데, 신약의 agape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람들을 선대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그처럼 집요하게 괴롭혔던 사울 왕의 후손들은 오히려 다윗에게 제거해야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조부 사울의 밭을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상에서 먹을지니라 (삼하 9:7).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갚았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음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발이 절뚝이었더라 (삼하 9:13). 다윗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자비를 기억하였을 뿐만 아니라, 므비보셋의 아비 요나단이 자신에게 베푼 자비도 기억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요나단과 같은 사례를 세례 요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며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3 5절로 6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 15절에 보면, 사람들이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6 20절에 보면, 갈리리 분봉왕 헤롯도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연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였고, 예수님도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매우 유사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외치는 메시지도 세례 요한과 본질상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요한복음 3 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세례도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며 유사한 사역을 하니까, 사람들이 서서히 예수님 쪽으로 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세례 요한 주변에는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습니다.

요한복음 3 26절에 보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볼멘 소리를 합니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 야단 났습니다. 선생님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예수의 인기는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위기입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문닫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기 질투에는 반드시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만 있을 때에는 시기나 질투가 생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등장하여 같은 사역을 하게 될 때에, 라이벌 의식이 싹트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복음 3 27절에 보면, 시기 질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내려주신 것인데, 왜 네가 불평하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신만큼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탐내는 것은 죄악된 탐심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저런 옷을 입혀 주셨고, 나에게는 이런 옷을 입혀 주셨으니,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며, 오직 하나님이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 덕에 내가 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가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는 목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신앙을 우리는 기복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쇠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세례 요한처럼 주님을 높여 드리기 위하여, 자신은 낮아지기를 소원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큰 자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인도 선교의 선구자 William Carey 가 임종하면서 곁에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윌리암 케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윌리암 케리를 구원하여 주신 분에 대해서 말해주게.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기를 바라네.

우리도 작은 일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할 때에, 세상은 우리를 작다고 여길지 모르나, 하나님은 귀히 보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하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주님을 높여 드리기 위하여 자신은 철저히 쇠하기를 소원하는 참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