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다윗   David, The Prophet ( 110:1-4)

 

지난 주일 통큰 통독 성경 공부 시간에 다윗이 선지자인가,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시편 110편을 함께 상고하면서, 다윗이 선지자였음을 살피고자 합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의 1절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성경 구절입니다. 시편 110 1절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신약에서 27번이나 인용되었습니다. 시편 110 1절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도 인용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 30절에서 다윗을 가리켜 “그는 선지자” 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2:31-32). 여기 인용된 구약 성경 말씀은 다윗이 지은 시편 16 10절입니다. 다윗은 선지자인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고 이미 예언을 했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 110편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 2:34-35). 다윗은 선지자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모습까지 미리 보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편 110 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 41절로 46절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편 110 1절을 인용하셔서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선지자 다윗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미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님 (My Lord) 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말씀한 두번째 비젼은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에게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 (order)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 아닙니까?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오고, 시편 110편에 나오고, 그리고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에 살던 조카 롯이 사로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318명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을 되찾아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주면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본 환상 중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대상 24장에 보면, 제사장의 반차가 24개가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1조부터 24조까지 있었다는 말입니다. 각 조가 성전에 들어가서 1주일씩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니까 24주에 한 번씩 순번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의 조직에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것은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 조직에 없는 반차입니다. 레위 지파의 반차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한시적인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한시적인 레위 지파 제사장 조직의 일원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다윗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실 것을 미리 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 제도가 있기 이전에, 레위의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축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으로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7 1절로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여기 보면, 멜기세덱의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라 함은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의 왕이 먼저이고 평강의 왕이 그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의가 없으면,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바른 관계가 아니면, 평화로운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관계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 가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가 있으면,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의가 있어야, 평강이 있습니다. 참된 평화의 기초는 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의의 왕이요, 또한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5 1절도 그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말씀하는 세번째 비젼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선지자 다윗은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것을 미리 보았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NIV 성경을 비롯한 몇몇 역본들은 권능의 날을 전쟁의 날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군사를 소집하실 때에, 거룩한 백성들이 자원하여 기쁨으로 몸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시편 110 3절은 성경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합니다. 한글 새번역이나 공동 번역은 우리가 읽은 개역 성경과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영어 번역본을 20개 정도 비교하여 보았는데, 다 조금씩 다르고, 특별히 후반부는 대부분의 영역본들이 you will receive (have) the dew of your youth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당신은 젊은이의 이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석들을 보면,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새벽 이슬처럼 수 많은 젊은이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고, 새벽 이슬 같은 젊은 정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詩篇 110 3절 전반부에서 모든 번역본들이 일치하게 번역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그것은 holy 라는 단어와 willing이라는 단어입니다. 주의 백성, 곧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크리스챤의 두 가지 특징이 무엇이냐? Holy and willing, 거룩과 즐거운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선지자 다윗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는 환상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거룩한 옷에 대하여 계시록 19 7절로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순결과 정절의 상징입니다.

 

계시록 3 4절에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내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곧 주님이 주신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가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흰 옷을 깨끗이 보존하는 백성이 주님의 거룩한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은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입니다. 예레미야 31 33절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옛 언약에서는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였습니다.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러한 율법은 안 지키면 저주와 사망이 임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타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스펄쳔 목사님은 하나님이 감사의 펜 (the pen of gratitude) 으로 우리 마음에 기록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우리 마음에 깊이 심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 못해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minimum)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매를 맞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억지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라는 마음으로 충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Holy and willing, 그것은 참된 크리스쳔의 지표입니다. 내가 주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3절에 선지자 다윗이 본 환상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holy willing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스랍들이 거룩 거룩하다고 외치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가운데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주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의 죄인 됨이 선명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추일 때에, 이사야가 본 것은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모시는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갖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합니다. 제단 숯불로 이사야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2 21절에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사야는 죄에서 정결케 됨으로, 이제 주님이 보내실 만한 거룩한 그릇이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깨끗한 그릇, 거룩한 이사야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자원하였습니다. 기쁨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선지자 다윗은 주님이 부르실 때에 즐거이 헌신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미리 보았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새벽 이슬과 같은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청년이란 나이가 30세 이하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의 기백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넘치는 열정으로 나아오는 주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선지자 다윗과 같이, 믿음의 눈으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참히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즐거이 헌신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