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의 충신이 된 다윗 (삼상 27, 29, 30)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의 가드라는 도시로 도망을 갔습니다.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 사람들은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금새 알아보았고, 정체를 들킨 다윗은 가드의 왕 아기스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해서 죽음을 면하고, 다시 유대 땅 아둘람 굴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7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은 또 다시 사울 왕을 피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갑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이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여기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국경을 넘어서 적진에 들어가는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서 굴 속으로 혹은 광야로 피신하는 삶이 너무나 힘들고 지쳐서, 사울이 쫓아올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는 심정으로 블레셋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결국 10년 전에 아기스 왕에게 미친 척하였던 다윗은 이제 아기스 왕에게 충신인 척하면서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울 왕조차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 땅을 떠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고난의 과정을 잘 견뎌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상의하는 대신, 자기 마음과 상의했습니다.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무엘상 27장부터 30장까지를 읽어보면, 다윗은 점점 더 늪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 듯했습니다. 먼저 274절에 보면,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한 1차 목표가 성취된 것입니다. 사울 왕의 추격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사울 왕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충신인 척해서 아기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275절에 보면,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얼마나 diplomatic한 수사입니까? 종이 왕과 함께 왕도에 살 수 없으니, 시골에 거할 수 있는 성읍을 하나 주십시오, 라고 청원한 것입니다. 다윗의 진짜 속셈을 그것이 아니지요. 아기스 왕과 그의 신하들의 감시망을 벗어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블레셋 땅에서 거점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동족 이스라엘을 치고 돌아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은 그술 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 등등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치고 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도록, 자기가 친 땅의 남녀를 모두 죽였습니다. 증거 인멸이 아니라, 증인 인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처럼 아기스 왕의 환심을 사고 블레셋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거짓말과 잔혹한 살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 기준에서 보면, 여기까지는 승승장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쳐서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았고, 아기스 왕에게도 계속 신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2712절에 보면, 아기스 왕은 동족을 쳐죽이고 돌아왔다는 다윗의 말을 믿고, 이제 다윗은 이스라엘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장에 보면, 드디어 다윗에게 어려움이 닥치는데,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블레셋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운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할 일이 못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전쟁은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는 전투였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 아기스 왕에게 지금까지 가짜로 충성하는 척했던 것이 탄로가 날 것이었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전쟁에 참가하라고 명합니다. 다윗은 본심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당연하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흡족한 아기스 왕은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고 말합니다. 가장 근접거리에서 아기스 왕을 지키는 경호대장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과연 다윗은 어떻게 될까요?

 

29장에 이르면, 이제 드디어 전쟁터로 나가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방백들이 다윗의 참전을 반대를 합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을 변호합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여러 해를 함께 했는데, 나는 그의 허물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블레셋 장군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다윗은 전에 골리앗을 죽인 인물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전쟁터에서 갑자기 배신을 해서 이스라엘 편에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서 사울 왕에게 바쳤던 것처럼, 우리의 머리를 들고 사울 왕에게 가서, 다시 사울 왕과 화합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합니까

 

아기스 왕은 장군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렸겠습니까? 이제 살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매우 섭섭한 척합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 하면서, 무슨 의심스러운 일을 하였기에,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십니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내 주 왕의 원수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그처럼 억울한 척하면서, lip service를 잔뜩 해놓고, 기분 좋게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0장에 보면, 다윗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남녀노소를 다 사로잡아 끌고 갔습니다. 성읍이 불타고 처자식이 다 없어진 것을 본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은 더 이상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blame 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였던 것처럼,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306절에 보면,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지요. 다윗은 이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재난을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시글락의 재앙으로 인해서, 다윗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옷이지요. 거기 흉패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아멜렉 군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군대는 지쳐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못해서 200명은 낙오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다윗은 추격을 계속하다가, 들에서 다 죽어가는 애굽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죽고 살려준 다음에 물어보니까, 자기는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이 드니까 버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 애굽 사람이 다윗을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처자식과 빼앗겼던 재산을 모두 도로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습니다. 꼼수를 부릴수록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급기야 처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왕으로 택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 회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잔꾀를 부리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였지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창세기 1210절 이하에 보면, 기근이 닥칠 때에 아브람은 믿음의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약속의 땅을 등지고, 자신의 유익과 지신의 판단을 따라서, 양식이 많은 애굽 땅으로 내려 갔던 것입니다. 단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떠났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아리따운 내 아내를 빼앗으려고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아브람은 부인에게 자신의 얄팍한 잔꾀를 말합니다. 너와 나는 부부 사이가 아니라 오누이 사이라고 하자. 창세기 20 12절에 보면,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아브람과 사라가 오누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한 부부 사이입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꾀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격이었습니다. 오누이다, 오누이다 하고 다닐 때에, 진짜로 바로의 신하들이 사라를 취하여 궁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오누이라고 하지 말고, 부부라고 하였으면 어떠했을까요? 나중에 바로의 태도를 보면, 바로는 남의 부인 사라를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사실은 오누이도 되지만 부부도 된다고 이실직고 하였으면, 다시 사라를 돌려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 약대를 하사품으로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람은 이제 오라비로서 결혼 지참금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얼마나 난처하였을까요? 남의 나라에 와서 자기 부인을 후궁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럽고 괴로웠을까요? 아마 기근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 싫어서 도망왔건만, 더 큰 곤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곤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를 되찾아 오게 됩니다.

 

시편 23편은 인간을 양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목동 출신이었던 다윗이 깨달은 영적인 진리였습니다. 다윗은 목자되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 양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실족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목자의 명예를 걸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끝이 둥굴게 굽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 길을 가다가 탈선하려고 하면, 그 끝이 둥근 지팡이로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든지, 목을 낚아채든지 해서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양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에는 목을 꺾기도 하시고 다리를 쳐서 넘어뜨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막으심에 대해서도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 길은 주님이 뜻하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막으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낮추심에 대해서도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 4:6).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6 14절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2 10절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 공동 번역으로 보면,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지 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 어깨를 묶는 기구입니다. 한 멍에 아래 두 마리의 소가 묶이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한 멍에를 메고, 함께 밭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와 전혀 다른 나귀를 한 멍에로 묶고 밭을 갈라고 하면, 이 둘이 보조가 잘 맞지 않겠지요?

 

그런데 여러 주석을 보면, 소와 나귀를 한 멍에로 묶지 말라는 말씀에는 제의법적인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소는 정결한 동물이고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같은 멍에 아래 묶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절로 16절에 보면,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함 (fellowship), 사귐 (communion), 조화 (concord), 상관 (have in common), 일치 (agreement)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멍에 밑에 묶였는데, 한 사람은 의의 길로 가자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불의의 길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빛의 길로 가자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둠의 길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따라가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사탄 (벨리알)을 따라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우상의 전에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함께 함과 사귐과 조화와 상관과 일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두 사람은 신앙의 길보다는 불신앙의 길로 가기 쉽습니다. 믿음의 도리를 포기하고, 불신앙과 타협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포기하고, 넓은 길로 가지 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 17절은 이사야 52 11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사야 본문에서는 포로 생활하던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명령은 영어로 “come out” 그리고 “be separate” 입니다. 죄악된 땅 바벨론에서 떨어져 나와서, 거룩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다윗도 사무엘하 2장에 보면,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하나님께 여쭙니다: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 가리이까?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은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었던 불의한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서,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의의 길을 가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동행하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놓지 않으시는 그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가 넘쳐서, 다윗과 같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