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논과 압살롬 (삼하 13)


사무엘하 12장에서는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였지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였을 때에 회개하고 용서받은 내용과 더불어서, 하나님은 용서하시면서도 다윗을 징계하셨다는 내용을 살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사울왕을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징계하셨습니다. 징계는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로 임신한 아이가 죽으리라는 징계는 사무엘하 12장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13장에서는 129절로 10절의 징계 내용이 성취됩니다: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집안에 살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징계였습니다.


13장에서 다윗의 장자 암논이 배 다른 동생 압살롬에게 살해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암몬과 암논이 발음이 비슷한데요. 암몬은 이방 민족의 이름이고, 암논은 다윗의 장자입니다. 전에 청년들하고 성경 공부를 하면서 매주일 퀴즈를 보았는데, 다윗의 맏아들 이름을 묻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청년들 중에는 한국말이 서툰 1.5세나 2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어떤 청년이 암논을 암놈으로 쓴 청년이 있었습니다.


암논은 배 다른 여동생 다말에게 상사병이 났습니다. 비정상이지요. 아무리 모친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아버지 다윗의 아들과 딸인데, 병이 날 정도로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그는 심히 간교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3). 그는 어떻게 여동생 다말을 강간할 수 있는지, 계책을 암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곧 아버지 다윗의 동정심을 이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암논에게 병문안을 왔습니다.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준 대로, 여동생 다말이 와서 과자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말에게 가서 오라비를 간호하라고 말합니다. 다말이 오자 암논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침실에서 손으로 먹여 달라고 합니다. 다말이 과자를 암논에게 먹여주려고 가까이 갔을 때에, 암논은 계획대로 다말을 강간하였습니다. 다말이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하고 저항했지만, 암논은 듣지 않고 힘으로 강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보기도 싫다고 하면서 내쫓았습니다. 다말은 자기를 내쫓는 행위는 강간의 행위보다 더 악하다고 항의했습니다. 다말은 쫓겨나서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공주의 채색옷을 찢고, 울부짖었습니다. 다말에게는 모친과 부친이 모두 같은 오라비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암논을 죽일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다윗이 암논에 대해서 심히 노했다고 했는데,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암논은 처벌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압살롬도 자기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암논을 미워하였지만, 그의 잘못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고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식들에게 엄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다윗 자신이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간음을 하였기 때문에, 자식의 강간에 대해서 엄히 꾸짖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2년 후에,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날에 크게 잔치를 베풀고 아버지 다윗과 모든 왕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양하자, 압살롬은 다윗에게 암논을 꼭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다윗은 왜 그러는지 좀 의아했지만, 압살롬이 간청하매 암논과 모든 왕자들을 보냈습니다. 압살롬이 종들에게 밀명을 내렸습니다. 암논이 술로 즐거워할 때에, 암논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왕궁으로 불러서 술을 먹이고 집에서 부인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인하였지만, 그 계책이 통하지 않자, 요압 장군에게 밀명을 내려서 전쟁터에서 암몬 사람의 칼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처럼 계책을 세워서 사람을 죽이는 똑같은 행동을 암논이 하였던 것입니다. 간음과 계획적인 살인, 이 모두는 아버지 다윗이 범한 죄들이었습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다니다가 봉변을 당합니다. 그런 거짓말을 한 이유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탐내어 취하기 위하여,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0장에서도 아브라함은 똑같은 거짓말을 되풀이합니다. 시간과 장소만 바뀌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대신 그랄 왕 아비멜렉입니다. 20여년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은 과거의 부끄러운 행동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와 똑같은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그랄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7절에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들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부끄러운 행동을 똑같이 판박이로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의 안 좋은 점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녀들이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이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뺏아 갈까봐 동생이라고 속이고 다녔습니다. 부인의 인간적인 생각에 휩쓸려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나중에 그로 인하여 집안에 불화가 일어나자, 당신 눈에 선한대로 하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결코 훌륭한 가장으로는 비추어지지는 않습니다.


모세도 구스 여자를 후처로 취하였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훌륭한 모습은 성경에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취했고, 솔로몬은 후궁이 천명 가까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후세에 길이 모델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아버지나 남편의 모습이 성경에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가 봅니다.


부모의 좋은 점은 자녀들이 잘 이어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례로,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누구의 소나 나귀를 취한 적도 없고, 누구를 속이거나 압제한 적도 없고, 자기의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삼상 12:1-3). 그런데 그 아들들은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득을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사무엘상 8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한 본은 좀처럼 본받지 않고, 악한 본을 잘 따르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지난 7월에 손자를 보기 위해서 켈리포니아에 갔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혼자 중얼중얼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얼거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왜 중얼거리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제 아들이 저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저는 따라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안 좋은 버릇이니까요. 그러나 자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를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아버지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성취 지상주의 아버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하바드에 들어가라, 그런 목표를 주고 들들 볶는 아버지입니다. 목표에 미달하면 혹독한 비판과 훈련을 가하는 아버지입니다. 잘했다는 칭찬에 아주 인색한 아버지입니다.


둘째는 시한폭탄형 아버지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을 터뜨리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세째는 방관형 아버지입니다. 무관심한 아버지입니다. 자녀와 대화하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혹은 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아버지는 멘토형 아버지입니다. 자녀들과 자상하게 대화하고 배려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뭐 온갖 좋은 장점은 다 가지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저는 성취 지상주의와 시한폭탄형과 무관심의 복합형입니다. 결코 멘토형이 아닙니다. 그래도 자녀들이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주어서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어머니 학교를 했는데, 미주 어머니학교 본부장이신 김미라 목사님이 내년에는 꼭 아버지 학교를 하라고 추천해 주셨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를 진행하는데,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왔다고 합니다. 서로 sharing 하는 시간에 이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목회자로는 성공하셨지만,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를 진행하시는 분이 이렇게 치유해 주셨다고 합니다. ‘형제여, 아버지가 형제를 낳아준 것만으로도 벌써 50점은 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이 세상에 나온 형제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으로 벌써 90점짜리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상하다, 말할 때 목소리가 부드럽다, 눈 웃음을 친다, 이런 것들은 나머지 10점 안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90점짜리 아버지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십니다. 야곱은 본래 부족한 인간이었지만, 평생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성자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히브리서 1121절은 야곱이 죽을 때에 자손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경건한 아버지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사야서
41 14절에 보면,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버러지처럼 야비하고 치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지렁이 같은 인간을 성화시키사, 세상 떠날 때에 아들 요셉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언을 하고, 손자들을 축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성자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승리였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석양이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듬어져 갑니다.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46 5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야곱의 하나님께 소망을 가져 봅니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이 부족하더라도, 자녀를 노하게 하는 아버지요,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지렁이 야곱을 성자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다듬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안 좋은 아버지의 예만 많이 말씀드린 것 같은데, 좋은 아버지의 예도 있습니다. 한국 대구에 정규만 장로님이라는 한의사가 계셨다고 합니다. 1940년대 말에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악질 전염병이 경북 지역에 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데, 유독 정규만 장로님의 한약방에서 지은 약을 먹으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용한 한의사로 명성을 얻은 장로님은 그때부터 돈을 긁어모으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그처럼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돈들을 포대 자루에 담아서, 세어보지도 않고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것도 자기 이름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성도의 이름으로, 혹은 목사님의 이름으로, 혹은 무명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자기가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어진 교회가 대구 서현 교회입니다. 당시에 동양 최대의 석조 예배당이 정 장로님의 헌금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자녀들과 손주 손녀들이 한국과 미국, 인도 등지에서 모두 교회당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Jonathan Edwards 목사님의 후손에 대하여 익히 들으셨을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18세기에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신 분이신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100여년이 지난 후20세기 초에, Princeton 신학교의 저명한 신학자인 Benjamin Warfield 교수가 에드워드 목사님의 후손 1,394명을 추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를 연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후손들 중에 부통령이 1, 주지사가 3, 시장이 3, 고위 공무원이 80, 대학 총장이 13, 변호사가 100, 교수가 65, 법대 학장 1, 판사 3, 의사 36, 의대학장 1, 그리고 수 많은 목사와 선교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찬란한 후손들이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20 6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손들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