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과 탕자 (삼하 14:1-33)

        지난 주에 살핀 사무엘하 13장에서는 다윗의 장자 암논이 배가 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내쫓자, 다말과 배가 같은 오라비 압살롬이 계획적으로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간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14장은 압살롬이 요압 장군의 중재로 다윗과 화해하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이 도망간지 3년쯤 지나자 (삼하 13:38), 다윗의 분노가 누그러지고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밀명으로 우리아를 죽인 사람입니다. 요압은 이번에도 다윗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곧 다윗이 압살롬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요압은 나단 선지자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만들어낸 이야기로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는 판결을 얻어낸 후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하여 다윗의 회개를 이끌어낸 나단 선지자의 방법을 요압은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드고아 지방의 지혜로운 여인을 내세워서, 다윗에게 만들어낸 이야기를 하게 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의 방법을 모방한 것입니다.

        요압이 만들어서 드고아 여인의 입에 넣어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남편이 죽은 과부라고 소개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들이 두 명 밖에 없는데, 둘이 들에서 싸우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는 아들 하나 밖에 안 남았는데, 온 족속이 일어나서 그 동생 쳐죽인 자의 죄를 갚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다윗에게 호소합니다. 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으면, 제 남편의 대가 끊깁니다: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11). 결국 다윗은 아무도 그 아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제 이 여인은 나단 선지자처럼 다윗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압살롬)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3),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4). 형제를 죽인 이 여인의 아들은 용서하라고 명하면서, 형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다윗 자신은 왜 용서하지 않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즈음에서 이 여인이 요압의 지시로 연극을 한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19). 여인은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다고 이실직고하였습니다 (19). 다윗은 요압을 불러서, 청년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얼굴을 2년 동안 보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아버지 다윗 앞에 설 수 있도록, 요압에게 다시 한 번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요압은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고, 요압이 일을 꾸몄지만, 지금은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압살롬은 종들을 시켜서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요압이 항의하러 왔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에게 말합니다. 왜 아버지 다윗은 나를 예루살렘으로 불러 놓고 화해를 하지 않으시냐? 나에게 죄가 있으면 죽이시면 될 것 아니냐? 벌도 안 주고, 용서도 안 해주고, 어정쩡하게 이게 뭐냐? 요압은 압살롬의 말을 다윗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한 것입니다.

Colin Smith 목사님은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가 세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고 보았습니다: (1) Love without Justice (2) Mercy without Access (3) Pardon without Repentance.

첫째로, Love without Justice. 사랑과 공의는 이율배반적인 두 개념이고, 성경과 신학의 큰 주제입니다. 다윗의 딜렘마도 사랑과 공의의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서 공의를 집행해야 했습니다. 압살롬은 계획적인 first degree murder를 범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 살인자를 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통해서 다윗의 자식 사랑을 자극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내쫓긴 자인데, 버린 자 취급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들먹이면서, 공의를 희생시킬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며, 내쫓긴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데, 왜 당신은 도망간 압살롬을 버린 자 취급하십니까?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마음 속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공의를 희생시키고, 압살롬을 받았습니다.

두번째로, Mercy without Access. 다윗은 압살롬을 사랑해서 공의를 무시하고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서,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편하게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었으나,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4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영어로 mercy seat입니다. 속죄소라고도 불렸던 언약궤 덮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 안의 mercy seat까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의 보좌 앞으로 access를 할 수 없었습니다. 왜 다윗은 압살롬을 접견하지 않았을까요? 여러 주석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데, 메튜 헨리는 압살롬이 진정으로 회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25절 이하에 보면,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칭찬받는 자가 없었고,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였습니다. 특별히 머리털이 왕관처럼 화려해서, 머리를 깎는 날이면 큰 잔치를 베풀고, 깎은 머리털 무게를 쟀는데, 200 세겔이었다는 것입니다 (1.4 kg). 외모가 뛰어난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짱이었습니다.

그처럼 그의 외모는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흉악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15장으로 넘어가면, 백성들의 마음을 도덕질해서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빼앗고자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세번째로, Pardon without Repentance.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은혜에 감사하는 대신에,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이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계획적으로 죽인 first degree murder에 대해서 아무런 처벌 없이 용서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은 없고, 아버지가 자기를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왕자로서의 온전한 지위가 회복되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요압을 통하여 압살롬의 말을 전해들은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표시였습니다. 압살롬은 회개하지 않았고, 마음 속에는 아버지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다윗은 자식에게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다 마찬 가지이지요. 회개하지 않은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 줌으로써, 다윗은 이제 큰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압살롬과 탕자인데, 압살롬은 돌아온 탕자처럼 보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압살롬과 탕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탕자는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15:17). 그라고 이렇게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15:18-19).

탕자가 회개하게 된 계기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는 그러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탕자가 스스로 돌이켰다는 구절을 영어로 보면, 킹제임스 성경에는 he came to himself라고 하였고, NIV 성경에는 he came to his senses라고 하였습니다.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언제 제 정신이 들었습니까? 흉년과 궁핍이 닥쳤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흉년과 궁핍이 임함으로 인해서 내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 궁핍은 변장된 축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C. S. Lewis 교수가 하루는 옥스포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젊은이를 조용히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더 교만해지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 오만한 인간, 그들에게 고통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네.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고통 속에서, 역경 속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때로는 흉년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궁핍도 인생의 장에서 약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던 것이 안 이루어지면 할렐루야! 하십시오. 내 뜻이 안 이루어지고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니 할렐루야를 외치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인생에 흉년이 오거든, 어려움이 닥치거든, 하나님이 여러분의 귀에 확성기를 대고 돌아오라고 크게 부르시는 소리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해결하지 못했던 사랑과 공의의 딜렘마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줍니다. 죄를 심판하시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기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 추호도 죄를 거저 용서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보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인애와 한이 없으신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 9 13절 이하는, 지혜도 자랑하지 말고 용맹도 자랑하지 말고 부함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이심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자리에서 나의 죄값을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공의를 희생시키지 않으셨고, 공의 때문에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우리 대신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압살롬과 같은 반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