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히도벨과 후새 (삼하 16:15-17:23) Ahithophel and Hushai


        오늘 본문은 압살롬을 보좌한 두 모사 (counselor), 아히도벨과 후새의 기사입니다. 두 사람 모두 본래 다윗 왕의 참모들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512절에 보면,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을 청하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새에 대해서는 사무엘하 1537절에 다윗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역대상 2733절에도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모사가 되었고,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새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가는 길에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애통하며 영접하였습니다. 다윗은 친구 후새에게 부탁을 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피난을 갈 것이 아니라, 압살롬에게 거짓 투항을 해서, 아히도벨의 모략 (advice, counsel)을 패하게 해달라, 아히도벨의 뛰어난 전략을 저지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후새는 다윗의 스파이로 압살롬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피난 길에서 돌려보낸 제사장들이 연락책을 맡게 됩니다.

며칠 전에 Islamic State commanderBaghdadi (바그다디)가 미군 특수 부대의 심야 급습으로 시리아 북서부 터어키 접경 도시에서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오늘 Washington Post에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Baghdadi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수행원 가운데 첩보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스파이가 Baghdadi가 어디에 은신해 있고, 그가 은신해 있는 집의 구조는 어떻고, 심지어 그의 속옷까지 빼돌려서 DNA 정보를 얻게 했다는 것입니다. 미군이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을 때에도, 그 정보원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 후새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첩자로 압살롬 밑에 들어가서 신망을 얻었고, 결국 압살롬은 후새 한 사람 때문에 파멸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첫번째 모략은 사무엘하 1620절로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가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삼하 16:21).

압살롬은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을 강간하였습니다. 근친상간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2011절에 보면,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1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였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49:4).

그런데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그런 짓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강간함으로써, 사람들이 보기에 다윗과 압살롬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는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처럼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한다면, 아히도벨을 비롯해서 압살롬을 따르던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입장이 난처해지고 완전히 선택을 잘못한 것이 되는 것이고, 반역에 대한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과 다윗은 이제 절대로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아히도벨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였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예언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하 12:11-12). 하나님은 다윗의 참회를 받으시고, 밧세바를 범한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동시에 징계를 통하여 자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히도벨은 더 중요한 계략을 베풀었습니다. 곧 자신이 만 이천 명의 병력으로 다윗을 밤에 급습하여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미군 특수 부대가 밤에 급습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나 바그다디를 죽이듯이, 다윗만 쳐죽이면 다윗을 따르던 백성들은 자연히 당신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피곤하고 힘이 빠져 있으니, 또 다윗은 아직 전열을 정비하지 못했고 취약하므로, 기습을 하면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은 panic이 되어서 도망을 갈 것이고, 다윗 왕만 간단히 처치하겠다고 말합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오늘 밤에 아히도벨 자신이 직접 가서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은 역시 가장 효과적인 계략을 베풀었습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그 말을 좋게 여겼습니다 (17:4).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에게 second opinion을 구합니다.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후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먼저 후새는 압살롬에게 공포심을 심어 줍니다: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해 있다고 말합니다 (17:8). 아히도벨은 다윗이 피곤하고 힘이 빠져 있다고 말했는데, 후새는 정반대로 분노한 용사로 묘사합니다.

이어서 후새는 아히도벨이 오늘 밤에 기습을 해도 다윗을 찾지 못할 것이러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과 같이 자지 않고 굴 (cave) 같은 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20년 동안 쫓아다녀도 잡지 못한 것처럼, 다윗은 이미 숨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군사 몇 명이 엎드러지면, 압살롬이 패했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그럼 당신의 용사들이 낙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영웅이요, 다윗의 부하들도 용사인 줄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근거 없는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말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처럼 다윗은 용사이고 영웅이고 전쟁에 능하기 때문에, 아히도벨의 야간 기습에 당할 사람이 아니고, 작전이 실패하면 당신 부하들이 낙심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후새는 압살롬의 불안과 공포심을 자극한 후에, 압살롬의 자만심 (pride) 을 자극합니다. 곧 대군을 이끌고 당신이 직접 전쟁에 참여해서 개선 장군이 되라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아히도벨이 앞장서는 작전이었습니다. 후새의 계략은 압살롬이 앞장서는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 단에서부터 군사를 모으고, 가장 남쪽 브엘세바에서부터 군사를 모아서,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대군을 이끌고 친히 전쟁터에 나가라고 말합니다.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는 압살롬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후새는 그처럼 압살롬의 영웅심을 자극했습니다.

후새가 그처럼 대군을 모집하라고 말한 것은 다윗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을 이기게 하는 작전이었고, 후새의 계략은 압살롬을 패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판정하였습니다 (17:14). 아히도벨은 자기의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17:23).

왜 압살롬은 후새에게 second opinion을 구했을까요? 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최고의 작전을 채택하지 않고, 후새가 제시한 패망의 길을 택하였을까요? 1714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압살롬의 마음을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패배는 다윗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15:31).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대로 아히도벨의 모략이 패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counsel을 들어야 할까요? 아히도벨은 사악한 계락을 베풀었습니다. 후새는 망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카운셀러는 누구일까요? 주님입니다.

이사야서 9 6절에는 아기 예수님의 다섯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 다섯 이름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름인 모사는 한국말로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모사꾼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도 나쁜 모사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히도벨이 좋은 예입니다. 가장 사악한 모사꾼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간교한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하와는 마귀의 악한 꾀에 넘어갔습니다. 에베소서 6 11절에는 마귀의 궤계 (schemes)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귀는 악한 궤계를 베푸는 모사꾼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모사란 counselor입니다. 좋은 뜻이지요. 예수님은 마귀와 같이 악한 카운셀러가 아니라 선한 카운셀러이십니다. 믿을 수 있는 신실한 (faithful) 카운셀러 이십니다. 그리고 체휼하시는 (hearty) 카운셀러 이십니다.

히브리서 4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온갖 시험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는 것입니다. 체휼한다는 것은 동정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 16절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시는 카운셀러 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서 counselor로 번역되는 단어가 또 있습니다. 곧 헬라어로 Paracletos 라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4 16절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번역되었고, 요한일서 2 1절에서는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로 번역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Paracletos는 성령님을 가르키고, 요한일서의 Paracletos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이고 성령님도 보혜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 원어에 파라클레토스는 ‘곁에’를 뜻하는 ‘파라’와 클레토스, 영어로 called, ‘부름 받은 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옆에서 돕는 분,’ 카운셀러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곁에는 늘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완벽한 카운셀러가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에, 이리로 가야 할지 저리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 삶의 목표를 상실하였을 때에, 마귀의 궤계에 흔들릴 때에, 모든 문제에 해답을 갖고 계신 주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이제 제자들 곁을 떠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와 동행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희가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부모 잃은 고아처럼, 큰 슬픔과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요한복음 14 16절은 그처럼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아버지가 또 다른 카운셀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카운셀러 예수님이 카운셀러 성령님으로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에 영원토록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 26절에 보면,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역경 가운데 낙심치 아니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함께 하시는 주님께 크고 작은 일을 늘 아뢰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카운셀링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며 도와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카운셀러로 삼으시고, 주님과 교재하며 동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