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찬의 무질서 (고전 11:17-22)

 

고린도전서 11장은 고린도 교회의 예배 시간에 행해진 무질서의 문제를 다룹니다. 지난 주에 상고한 11 1절로 16절은 예배 복장의 문제, 특별히 말씀이나 기도 순서를 맡은 여자들이 머리에 쓴 것을 벗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17절 이하는 애찬과 성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오늘은 17절로 22절까지에 나오는 애찬의 무질서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잡히시던 밤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찬 중에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찬과 성찬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선례를 따라서, 만찬과 성찬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행하였습니다. Vernon McGee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In that day, the Lord’s Supper was preceded by a social meal. These dinners for fellowship were called an agape or “love feasts.”  This was a part of the fellowship of the church, the coinonia, In that day, the social gathering led right into the Lord’s Supper. It was kept separate, but the agape always preceded the Eucharist (성찬). Later on, these feasts were separated, and they are not practiced like that today. We do not have a “love feast” or dinner which precedes the Lord’s Supper.

 

여기 사랑의 만찬 (love feast, agape feast) 이라는 단어는 유다서 12절에 애찬 (agapais) 이라고 나옵니다. 같은 단어를 King James 번역은 feast of charity로 번역하였습니다. 곧 사랑의 만찬에는 구제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끼니 걱정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매일 행하는, 혹은 일주일에 한 번 행하는 사랑의 만찬에 오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도 받았습니다. 교회에 오면, 영육이 살찌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성찬에 앞서서 행하는 애찬에는 친교와 (fellowship)와 구제 (charity),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The love feast, or “agape meal” (Jude 1:12), in the early church looked like a potluck meal today, but it functioned more like an offering on behalf of the poor (Swindoll).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 두 가지 순기능을 역기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곧 애찬의 unity 정신을 disunity로 바꾸어 버렸고, sharing and caring 정신을 selfishness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18절에서,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는 바울이 1장부터 4장까지 다룬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어서 분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에서 사랑의 교제를 위한 애찬 시간에도 분당 별로 모여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unity를 위한 애찬이 disunity를 실천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끼리끼리 모여서 먹는 분파적 회식의 장면에서도 한 가지 이로운 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19절에 보면,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 진실한 (바르게 사는) 사람이 드러나려면, 분파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약간 sarcastic 한 표현인데, 그렇게 따로 모여서 식사를 함으로, 진실하지 못하고 불의한 그룹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애찬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식사였습니다. 집에 변변하게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성도들이 교회의 애찬에 오면, 다른 부자 교인들이나 형편이 괜찮은 교인들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허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2 45절에 보면, 초대 교회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음식도 나누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부자들이 자기가 가지고 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었습니다. 아마도 편당끼리 나누어 먹었겠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교회 만찬에 와서 배를 곯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너무 먹고 마셔서 술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네 음식을 너 혼자 먹으려면 집에서 먹을 것이지, 왜 교회로 가지고 왔느냐,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너희를 도저히 칭찬할 수 없다고 22절에서 말씀합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이렇게 주경하였습니다: Though the Corinthians were supposed to gather to celebrate their unity in Christ, various factions and cliques huddled into their own exclusive groups. One of the purposes of the charity meal (or “love feast”) was to provide for the needy families of the congregation suffering from hunger.

 

Instead, this opportunity for genuine, unconditional love expressed through the gracious benevolence of the wealthy on behalf of the poor turned into a “Dutch treat” approach in which the rich got fatter and the poor went hungry. The destitute were ignored and abandoned to hunger at a time when they needed the church’s love the most. How insensitive! How pathetic!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벽을 허무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도 허무셨다고 에베소서 211절로 19절은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는 당시의 모든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이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을 성찬을 통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애찬을 통하여 교회의 나눔과 돌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한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애찬과 성찬을 행하면, 그것은 애찬과 성찬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바울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말씀합니다. (새번역: 여러분이 분열되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서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주일 아침마다 미국의 교회들은 인종 차별을 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On Sunday, America is the most segregated country in the world). 흑인 노예들이 해방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예배드리고,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예일 대학에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쳤던 유명한 헨리 리차드 니이버가 하바드에서 쓴 졸업 논문 제목이 <종파주의의 사회적 출처>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1929) 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종파들을 사회 계층별로 분석해 보면, 백인이 가는 교회와 흑인이 가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은 물론, 배운 사람이 가는 교회와 못 배운 사람이 가는 교회, 부자들이 가는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교회, 진보적인 사람들이 가는 교회와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는 교회가 다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끼리끼리 모여서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추악한 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현상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연합, 하나 됨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마귀는 교회에서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를 보전하사,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전하시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 곧 분열하지 않는 것을 연계시켜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귀의 병법은 교회를 밀까부르듯 흩어서 약화시킨 다음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인데, ‘디아’는 ‘사이’라는 뜻이고, ‘볼로스’는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마귀란 사이를 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서로 참소하게 합니다. 사단의 전공은 사이를 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고, 마귀는 나뉘게 하는 자입니다.

 

심지어 교회가 하나가 되자는 운동이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곧 세계 교회를 하나로 만들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었습니다. 1948년에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장로교는 교회 일치 운동인 WCC 때문에 통합과 합동으로 양분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장로교회사는 분열의 역사입니다. 먼저 일제 때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옥고를 치루고 나온 출옥 성도들은 해방 후에 신사 참배한 사람들의 공식적인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신사 참배를 한 사람들은 물론 회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출옥 성도들은 말만 가지고는 안되고 일정 기간 자숙하는 기간을 가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신사 참배를 한 대다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1952년도에 별도의 총회를 세우고 분립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려측이고 고려 신학교입니다.

 

또한1952년 총회는 육이오 사변의 와중에, 또 고려파가 갈려나가는 와중에, 김재준 목사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제명하고 이듬해 1953년 총회에서는 목사 파면 처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회와 한신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1959년에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쟁점으로 하여 통합과 합동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찬성한 통합측 신학교는 장신이고, 반대한 합동측 신학교는 총신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합동측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지만, 크게 보아서 한국 장로교는 고려파, 기장, 합동, 통합, 이렇게 네 개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분열이 세계 교회 통합 운동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교회를 제도적으로 통합하려던 시도는 오히려 분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 분열합니까? 마귀의 궤계에 빠져서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비본질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목회자 중심으로 흘러서,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면서 내홍을 겪었습니다. 또 성령님은 본질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비본질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면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안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중심으로 나아가면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을 강조하면 분열로 나아갑니다. 비본질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산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다르므로 서로 틀렸다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정죄하면,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는 사람은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사람을 좌경이라고 몰아 붙이면 안됩니다.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사람도 부흥회 쫓아다니는 사람을 깔보면 안됩니다. 다양성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물과 기름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둘 사이의 담을 허물고 화평을 이루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면 하나가 됩니다. 인종적, 문화적 배경은 비본질입니다. 비본질을 강조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인 것처럼, 두 인격이시지만 일체이셨던 것처럼, 우리가 혼연일체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은 주님이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고, 성령도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며, 하나님도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니, 너희가 하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주님의 간곡하신 뜻을 결단코 따를 수 없다는 사람은 멸망의 자식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로 보전되기를 간곡히 기도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