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에 임하는 합당한 태도 (고전 11:23-32)

 

지난 주에는 애찬에 임하는 합당한 태도에 대해서 상고하였습니다. love feastcharity feast의 정신을 살려서, caringsharing의 마음으로 애찬에 임하여야 함을 상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성찬에 임하는 합당한 태도에 대해서 상고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24절에 보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25절에서도 “잔을 가지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경적인 근거는 히브리서 9 15절로 17절입니다. 15절은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씀한 후에, 16절과 17절에서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보면, 15절의 언약이라는 단어와 16, 17절의 유언이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 (디아데케)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은 유언과 같아서, 예수님이 죽어야 효력을 발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언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바로 앞에 두시고 잡히시던 밤에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내 피로 새 언약을 세우니,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언약은 언약을 세운 사람이 죽어야 효력을 발휘합니다. 곧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새 언약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성찬을 행하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떡은 나의 몸이요, 잔은 나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카톨릭의 화체설이 있습니다 (tran-substantiation: the wine and bread actually become Christ's physical blood and body). 다음으로 종교 개혁가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하였습니다 (con-substantiation: the body of Christ is in, by, with, through and under the bread).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습니다 (Christ is spiritually present with the bread and wine). 그리고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였습니다 (symbolization: the bread and wine symbolize Christ's body and blood).  이 문제는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27절의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성찬의 떡과 잔은 단순한 상징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하여 합당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Barclay는 “it is a means not only of memory but of loving contact with Jesus Christ.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메시야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들은 집에 함께 들어가 유하게 되었습니다. 30절로 31절은 말씀합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마찬 가지로, 성찬에는 주님이 임재하십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으로 받는 사람은 주님과 접촉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합당치 않게 성찬에 참여함으로 인해서, 몸이 약하여 지고 병이 들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30).  

 

27절에 “합당치 못하게” 라는 구절은 영어로 unworthily 라는 부사입니다 (referring not to a person but to the state of mind). Donald Barnhouse 목사님의 강해에 보면,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I remember reading of an aged saint oppressed by a sense of his unworthiness. He bowed weeping as the sacred emblems were going around and refused to touch the bread. When the deacon offered it, he sobbed, I am too great a sinner to receive that which is so holy, and the aged Holland minister exclaimed, Take it; it is for sinners and for none else that Jesus died. 

 

합당치 않게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마음 자세를 가리킵니다. 대수롭지 않게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합니다 (Paul is speaking to church members who were rushing into it without thinking of its meaning and thus, were not honoring the body of Christ. LABC).

 

그런데 29절의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신다”는 말씀에서 주의 “몸” (body)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번째는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주님의 몸, 곧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보는 해석입니다. 곧 분당과 분파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전체의 맥락과 애찬에서도 가난한 자를 차별하며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함을 지적했던 맥락 (context)에 비추어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려는 마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Swindoll 목사님은 이렇게 강해하였습니다: The context suggests that Paul is referring to treating the corporate body of Christ,the church, in a respectful and dignified manner. Paul's chief complaint is that in celebrating the Lord's Supper, certain believers in the church in Corinth were completely denying the self-sacrificial humility exemplified in Christ's incarnation and atonement. Instead of working toward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 their failure to provide for the poor and needy among them was tearing it down.

 

여러분은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화란 할머니는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독일군에 체포되어서 라벤슨부르크에서 처절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리 여사의 언니였던 베티는 고문 끝에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코리 여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명을 보존하고 나왔는데, 하나님이 그 독일인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코리 여사는 간증 설교자가 되어, 저는 이렇게 수용소에서 고생을 하였고 제 언니는 고문으로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여러분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의 복음, 그 치유의 메시지에 은혜를 받고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은혜를 받은 독일 사람들이 나아와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여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간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의 손에 언니 베티가 욕을 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악몽같은 괴로운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는데, 그 남자는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코리 여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내게서는 한마디 대답만 솟아 나왔다. 하나님, 저 사람 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는 사이에 그 남자는 바로 앞까지 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코리 여사가 그 간수의 손을 잡았을 때에, 그 남자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한다고 말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 순간 주님의 사랑이 코리 여사에게 넘치게 임하고,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간수의 모습을 본 코리 여사의 동생은 여전히 치를 떨며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니, 그 사람은 우리 언니를 죽였잖아. 우리 언니를 발가 벗겼잖아. 언니는 그 수치를 벌써 잊어 버렸어? 언니는 자존심도 없어?

 

코리 여사와 동생은 주일날 성찬 예식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동생은 두 손을 움켜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성찬식에서 본 동생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동생의 눈에 분노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분노를 이길 수 없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성찬은 점점 동생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성찬이 바로 앞까지 왔을 때에, 동생은 움켜진 손을 펴고 떡과 잔을 받았습니다. 두 자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은총을 받을 때에, ‘주님 저도 용서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으므로,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고린도전서 5 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누룩을 제하여 버리는 무교절, 그리고 성찬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2 14절과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의 규례를 자손 대대로 영원히 지키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26절에 보면, 유월절을 지킬 때에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마찬 가지로 우리도 자녀들에게도 성찬의 뜻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성찬은 귀로 듣는 설교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설교입니다. 성찬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자녀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체험케 해주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계속 지키라고 명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계속해서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11:26).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하라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살을 찢겼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내가 너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렸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잊지 말고 기억하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은 곧바로 무교절로 이어집니다. 유월절 날부터 칠일 동안 무교병, 곧 누룩이 없는 떡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 8절에서 유월절 명절을 지킬 때에,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라고 말씀합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왜 유월절에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하는지, 그 영적인 의미를 설명한 것입니다. 누룩은 죄와 부패의 상징이므로, 주님의 몸  교회에 누룩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강조하였던 이유가 1절에 나오는데, 곧 고린도 교회가 음행의 죄를 단호히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권징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런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제하여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가 꼭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무교절은 누룩을 만드시 제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한 집에 어린 양의 피와 누룩이 동시에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주님의 피와 죄는 동거할 수 없습니다. 죄악은 구속받은 성도의 마음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누룩을 제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들도 누룩을 제거하는 자세로 자신을 늘 성찰하여야 합니다. 청산해야 할 죄악은 없는지, 하나님 대신 앉아있는 우상은 없는지, 얽매이지 쉬운 무거운 짐은 없는지, 내 안에 있는 누룩을 살펴야 합니다. 형제의 흠을 찾는 자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들보와 같은 죄를 살펴야 합니다. 비단 성찬식 때만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