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고전 12:31-13:3)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지난 주 토요일에 버지니아의 Charlottesville 에서 있었던 white nationalists (white supremacists) 집회에서 neo-Nazi를 자처하는 20세 남자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hate rally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던 군중을 향하여 자신의 승용차로 돌진해서 한 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고, 양쪽에 다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해서, 많은 반발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바마 전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 수백만의 likes를 받아서, 트위터가 생긴 이래로 두 번째로 많은 likes를 받은 트윗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바마가 올린 트윗은 Nelson Mandela의 자서전인 Long walk to Freedom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I always knew that deep down in every human heart, there is mercy and generosity. No one is born hating another person because of the color of his skin, or his background, or his religion. People must learn to hate, and if they can learn to hate, they can be taught to love, for love comes more naturally to the human heart than its opposite. 저는 트위터 계정이 없습니다만, 만약 제가 유명한 목사로 트위터 계정이 있었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올렸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불리지요. 이 고린도전서 13장은 너무나 좋은 말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액자에 걸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은 12장의 마지막 절인 1231절과 14장의 첫 절인 141절과 연결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다른 모든 말씀과 마찬 가지로 context 속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D. A. Carson 교수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절 말씀 가운데, ‘사모하라는 단어는 서술형 (indicative) 으로 보는 견해와 명령형 (imperative) 으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이견이 생긴 원인은 헬라어의 2인칭 복수 현재 서술형 어미와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 어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법적으로는 사모하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사모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한글 성경과 영어 성경이 사모하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였지만,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모한다는 서술형으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여러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말씀한 바울이 (12:11, 18)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데, 너희는 여전히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구나,’ 라는 뜻의 냉소적인 꾸짖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술형으로 보는 또 다른 근거는 1412절에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고 서술형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근거는 141절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1231절과 141절에는 zeloute 라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141절은 확실히 명령형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1231절로 명령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반론의 근거는 1231절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kai 라는 접속사입니다. Kai는 영어로 and 인데, 전반부를 서술형으로 볼 경우에는 kaiand 가 아닌 but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너희는 여전히 더 큰 은사를 구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헬라어로 de 와 같은 but의 뜻을 가진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고, kai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점을 서술형으로 보는 견해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명령형으로 볼 때에, 더 큰 은사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141절에 보면,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하고, 이어서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방언의 은사보다 더 큰 은사인 예언을 사모하라는 뜻으로 1231절의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231절에서 제일 좋은 길을 보여준다고 할 때에, “제일 좋은 길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141절에서 말씀하는 사랑입니다. 141절을 우리 성경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번역을 했는데, 헬라어로는 단순히 사랑을 따르라’ (pursue love) 입니다. 좀 의역을 하면, ‘사랑의 길을 따르라입니다 (NIV: follow the way of love). 그러니까 제일 좋은 길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사랑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134절과 5절에 나오는 육체의 열매들을 맺고 있었습니다 (투기, 자랑, 교만, 무례함, 자기의 유익을 구함, 성냄, 악한 것을 생각함, 등등).

 

바울은 131절로 3절에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그  모든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서는 방언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구리는 고린도의 특산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꽹과리는 고린도의 Dionysius 신전에서 광란의 제의를 행하면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러운 잡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의 주어가 나 (I) 입니다. 내가 소리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2절도 마찬 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예언과 지식과 믿음의 은사가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Leon Morris는 바울이 그처럼 1인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말씀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I am nothing. 사랑이 없으면, 나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3절은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는 구제와 화형으로 순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I gain nothing,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D. A. Carson 교수는 고린도전서 131절로 3절에 대해서 이렇게 요점을 말했습니다: In the context of the three chapters, the point of Paul’s argument in these verses is clear. He says, in effect: You who think that because you speak in tongues you are spiritual, you who prove your large endowment from the Holy Spirit by exercising the gift of prophecy, you must understand that you have overlooked what is most important.

 

By themselves, your spiritual gifts attest nothing spiritual about you. And you who prefer to attest your rich privilege in the Holy Spirit by works of philanthropy, you must learn that philanthropy apart from Christian love says nothing about your experience with God. You remain spiritually bankrupt, a spiritual nothing, if love does not characterize your exercise of whatever grace-gift God has assigned you.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여자가 잘 모르는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만약 100일 동안 밤마다 우리 집 앞으로 와서 큰 나무에 하트를 새겨 준다면 당신 뜻대로 결혼하겠습니다." 그 날 밤부터 그 남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여자 집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녀의 집 앞에 있는 큰 나무에 하트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큰 나무에는 하트 표시가 늘어만 갔습니다. 10, 20, 30, 그리고 90개로 늘어 갔습니다.

 

그리고 99일째 되는 날 밤, 그 날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변함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 앞의 나무에 큰 하트를 새기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이런 남자의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다가, 어두운 밤에 비를 맞으며 사랑의 표시를 새기는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녀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문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겠어요. 내일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우리 오늘밤에 결혼해요!" 그러자 하트를 새기고 있던 남자가 매우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 저는 알바생인데요!"

 

여러 분 같으면 그런 알맹이 빠진 사랑을 받으시겠습니까? 하트를 백 개가 아니라 천 개를 새긴다고 하더라도, 알바생이 새긴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아무리 큰 성령의 은사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 행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에 사랑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말세에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환난과 핍박이 있고,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사랑이 식는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 1절 이하에도,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세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시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에서 형제를 미워하여 죽인 가인과 형제를 사랑하되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인류 최초의 형제로서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시되,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그러나 가인은 들에서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근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가인의 살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바로 미움이었습니다. 미움은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5절은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미움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가인과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기를 주는 사랑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랑입니다. 싫은 사람도 주 안에서 용납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 16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말 뿐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확증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 8절은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너희도 이처럼 행함으로 사랑하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너희도 형제 사랑을 행동으로 증거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는 것이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우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고 상처주는 모습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해보겠다고, 성전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향한 주님의 명령은뒤로 돌아 갓!’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형제와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형제를 뒤에 두고 들고 나온 예물이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헛된 예배입니다. 하나님 받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인이란 사람을 죽이는 행위 뿐 아니라, 마음 속의 증오와 멸시의 말까지 포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 하였다면, 모욕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면, 행동으로 잘못을 하였다면,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용서 받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는 또한 그 형제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예배도 헛되며, 우리의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삶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이 담대히 나아가 아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