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법 (고전 13:4-7)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2장에서는 여러 은사가 있지만, 그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분은 한 성령님이라는 unity를 강조했습니다 (12:4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그리고 그것을 몸과 지체로 비유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그러하다고 말씀했습니다 (12:12).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12:7).

 

그리고 12장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 (방법)을 보이겠다고 말씀합니다. 13장에서 말씀하는 사랑의 방법인 것입니다. 131절로 3절에서는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크고 좋은 은사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134절로 7절에서는 사랑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 (definition)가 아니라, 실제적인 묘사 (practical description) 입니다. 4절로 7절에 나오는 사랑의 방법에 대한 묘사는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7가지 긍적적인 (positive) 묘사와 8가지 부정적인 (negative) 묘사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묘사들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은사 사용 방법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non-charismatics) 은사자들을 투기하였습니다. 반면에 은사자들은 (charismatics) 자랑하고 교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4절로 7절이 말씀하는 사랑의 방법에 대한 15가지 묘사 중에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먼저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Melvin Newland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A man wrote: "Dear Abby, I am in love & I am having affairs with two different women other than my wife. I love my wife, but I love these other women too. Please tell me what to do, but don’t give me any of that 'morality' stuff." Signed: "Too much love for only one.”

I think Abby’s answer was "classic." She wrote: “Dear 'Too much love for only one.' The only difference between humans & animals is morality. So you need to write to a veterinarian."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agape,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아가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은사를 아가페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오래 참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부정적 묘사로는 성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인내 (marco-thumei) 라는 단어는 “long”“wrath”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으로 화를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입니다. Jeff Strite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The story’s told of an actor who was playing the part of Jesus in a passion play. As he was carrying his cross up the hill a heckler in the crowd made fun of him and said terrible things to him. The actor threw down the cross, walked over… and decked the guy.

The director took him aside and told him “I know he was a pest, but I can’t condone what you did. Besides, you’re playing the part of Jesus, & Jesus never retaliated. So don’t do anything like that again."

Well, the man promised he wouldn’t. But the next day the heckler was back worse than before, & finally the actor exploded and punched him out again.

This time the director said "That’s it. I have to fire you. We just can’t have you behaving this way while playing the part of Jesus."

The actor begged, "Please give me one more chance. I really need this job, and I can handle it if it happens again." So the director decided to give him another chance.

The next day he was carrying his cross up the street. Sure enough, the heckler was there again. You could tell that the actor was really trying to control himself, but it was about to get the best of him. He was clinching his fists and grinding his teeth.

Finally, he looked at the heckler and said, (pause) "I’ll meet you after the resurrection!"

Now that strikes us as funny because we know that actor wasn’t being Christ-like. We know that actor wasn’t being “long suffering” like Jesus would have been. We know that actor wasn’t showing love.

 

두번째로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kind (친절)이고, 의미적으로는 인자와 자비를 뜻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오래 참음과 온유는 모두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투기와 교만과 무례함과 불의와 같은 육체 (죄성)의 열매들을 맺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의 방법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3 15절에 보면, 독한 시기는 마귀적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 처음에는 부러워합니다. 나도 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면 좋겠는데, 비교 의식은 질투로 발전합니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질투와 미움은 살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살인 사건의 20%가 그 원인이 질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마귀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귀적인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선택되는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왕의 후보로서 피택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저는 도저히 이런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면서 숨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010절에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만난 후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는데,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923절로 24절에도 보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 전쟁을 치루면서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발휘합니다. 고린도전서 1228장에 나오는 다스림의 은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주 추한 사람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에,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의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비교로부터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질투는 결국 사울왕의 삶을 파괴시켰습니다. 점점 지혜가 없어지고 능력도 상실하면서 무력한 왕이 되어 갑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자폭해 버리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기 일생을 끝내고 맙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에게 임한 질투의 배후에는 악령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내릴 때마다, 그는 다윗을 향하여 단창을 던져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시기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새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전혀 질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용사였고 전쟁에도 능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해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위를 다윗에게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23 17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사울왕이 볼 때에 이런 요나단은 정말 정신나간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고 말합니다 (삼상 20:30-31). 한마디로 이 바보같은 놈아 정신차려라, 하는 말입니다.  

 

요나단은 바보였을까요? 그래서 다윗에게 네가 왕이 먼저 되라고 양보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단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윗을 도왔던 것은 단순히 다윗을 사랑해서 만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동성 연애를 하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의식하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다윗을 통해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하는 말을 보면, 구구절절이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 20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요나단은 인간적인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너와 나 사이에 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 27절에서 시기 질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대답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내려주신 것인데, 왜 네가 불평하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신만큼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탐내는 것은 죄악된 탐심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저런 옷을 입혀주셨고, 나에게는 이런 옷을 입혀주셨으니,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며, 오직 하나님이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래 참는 인내를 또 다시 말씀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The word in Greek, stego, means “cover” or “hiding by covering.” This does not refer to hiding hurtful sin but to protecting someone from embarrassment, gossip, or any other such harm. When believers love one another, they refuse harmful gossip and protect one another from those who would try to inflict harm. (LABC)

 

베드로전서 4 8절에 보면,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허물을 덮는다고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노아 가족의 기사입니다.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내놓고 자고 있을 때에, 그 치부를 옷으로 덮어준 아들도 있었고, 흉을 보고 떠벌이고 다닌 아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멀리 있던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둘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렸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가 입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 22절을 보면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기 위해서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과 약점을 덮어주는 사람이었던데 반해,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떠들고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물을 볼 수 있고, 아내와 남편의 허물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허물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과 약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어찌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약점과 허물을 가지고 이곳 저곳 다니면서 떠벌이게 만듭니다. 죄성에 물든 사람들이 남의 허물과 약점을 발견하면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귀가 그것들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일보다 남을 흉보는 일을 재미있어 합니다. 남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도, 남의 약점과 허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었다는 말을 하면 시큰둥하다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면 눈을 반짝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약점을 듣고 나서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내가 너를 믿고 너에게만 말하는데, 너만 알고 있어, 알았지? 무덤까지 가는 거야!” 세상에 무덤까지 가는 비밀이 어디 있어요? 그 다음 날로 당사자에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마귀의 목표,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신과 미움을 심은 일이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자녀들의 허물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심령 깊은 곳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로 다 씻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기 때문에, 주님은 과거 우리의 잘못을 들먹이지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 잘못이나 죄와 허물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낱낱이 들추어내신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과거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물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되고, 지나간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버지 노아 의 허물을 들추어 낸 함은 자자손손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준 셈과 야벳은 자자손손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죄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는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자신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는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을 보시고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쁘셨고, 그 삶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 덮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를 하나님은 너무 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떤 존재입니까? 마귀는 성경에 보면 끊임없이 사람들을 참소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 사람들의 죄를 그저 보고 넘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죄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를 들추어내어 참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기적도 행할 수 있고 능력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마귀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마귀는 칭찬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소만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고 소문내며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마귀 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들추어 소문내고 흉을 본 함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들추어서 이야기하던 함은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마귀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을 볼 때 하나님이 너무 너무 기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에게 자손 대대의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부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 자자손손이 복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