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에 대하여 (고전 16:1-4)

 

오늘 본문에 연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연보와 헌금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드리는 헌금을 연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연보라는 단어 대신 헌금이라는 단어가 점점 더 많이 쓰이게 된 것 같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는 연보와 헌금이 같은 것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조금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어로 연보는 collection이고 헌금은 offering인데, 성경의 용례들을 보면, 헌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전 헌금함), 연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모금 (fundraising)의 성격을 띄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교인 돕기 구제금).

 

헬라어로 연보는 logeia 인데, 당시 사회에서 정기적인 세금 외에,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부금을 가리켰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logeia의 일반적 용례를 사용해서, 정기적으로 자신의 교회에 드리는 일반 헌금과 구별되는 예루살렘 교회 돕기 모금에 logeia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Swindoll 목사님의 책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logeia “collection,” “voluntary contribution”: In Greek literature logeia is used to designate occasional contributions to a particular cause rather than regular, systematic taxes. Such contributions may sometimes be related to needs arising from crises or the support of religious orders. In Paul’s two uses of the term in 1 Corinthians 16:1-2, he draws on this cultural understanding that the “collection” was a voluntary offering for the sake of the desperately needy believers in the Jerusalem church. It would be regarded as giving that is distinct from the regular giving to the needs of their own local church.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의 주 목적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교인들을 돕는 구제 헌금을 이방인 교인들로부터 걷었던 사도 바울의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신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실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서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 힘들었던 유대인 크리스챤과 이방인 크리스챤의 다리를 놓고자 함이었습니다. 곧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지체이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에 동참해야 함을 가르치고 실천하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기 민족 유대인을 구제할 것을 가지고 오순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들어왔다가 (24:17),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알아보고, 이 사람이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가르침을 각처에서 행하던 사람이라고 무리를 선동함으로 체포됩니다 (21:27-30). 무리에게 매를 맞던 바울은 소요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출동한 로마 천부장과 백부장들과 군사들에게 구조되어서, 결국은 로마로까지 압송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연보 혹은 헌금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이 나오는데, 우리의 헌금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 원리들입니다. 첫째, 매 주일 드려야 합니다. 2절에 보면, “매주일 첫날” (주일)에 저축해서 (set aside, put aside, lay in store) 떼어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주일, 곧 예배드리는 날에 예배의 일환으로 매번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드리는 헌금도 지속적으로 정기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누구나 드리는 것입니다. 2절에 각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은 부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는 모두 헌금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헌금은 교인의 의무입니다.

 

세째로, 2절에 이를 얻은 대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NIV 성경은 수입에 비례하여 (in keeping with your income) 드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헌금은 모든 사람이 같은 금액을 내는 회비가 아닙니다. 헌금은 수입이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냅니다. 그것이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형편에 따라 비율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가면, 바울이 거둔 연보에 대해서 말씀하는 곳이 있습니다. 곧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많은 헌금을 한 교회는 가장 가난하였던 마게도니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 1절에서 5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새번역으로 읽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힘껏 구제 헌금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힘에 지나게 하였다는 것은 희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의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sacrifice,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요 제사인 것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하여 말씀한 것 가운데 또 한가지 주목하여야 하는 구절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바쳤다는 구절입니다. 창세기 4 4절과 5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물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한 것은 헌신이었습니다. 자신을 먼저 드리고, 그 표시로서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헌금을 바칠 때에,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그가 어렸을 때에 자기 동네에 부흥사가 와서 집회를 하는데, 헌금 시간에 돈은 없고 바치고는 싶어서, 헌금 바구니를 따라 나가서 자신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받으실 때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의 헌금도 받으십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귀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심음과 거둠에 대하여 말씀하는 곳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후서 9 6절은 연보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126편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하여, 배우자를 위하여, 부모님을 위하여, 친지와 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의 씨를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다니엘 기도회 기간에 제가 큰 은혜를 받은 강사가 있었는데, 하바드 대학에서 가르치는 젊은 여자 교수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찢어지게 가난한 목사님의 딸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개척 교회 목사님입니다. 아버지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냐는 대답이 돌아 왔다고 합니다. 너에게 줄 수 있는 물질적인 도움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요. 우리가 천국에 너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저축해 두었으니,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꺼내 써라. 저는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를 많이 저축해 놓았으니, 필요할 때마다 얼마든지 찾아 써라. 자녀를 위한 기도도 심는 것입니다. 자녀가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 9절과 10절은 선행 곧 착한 일의 씨를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선행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심는 자에게는 축복이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끼치고, 후손들에게는 축복의 유산으로 전수되는 것입니다

 

Frank Shu 라는 중국인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추운 겨울날 뉴욕의 어느 공원에서 기침을 하며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 노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이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사역하고 빈털털이로 은퇴한 목사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Mr. Shu는 중국에서 William C. Booth 라는 장로교 선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에 대하여 각별한 존경과 애정과 감사를 갖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평생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분이 이처럼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1948년에 백만불을 희사해서 기후 좋은 LA 근방에 Westminster Gardens 라는 은퇴한 선교사들을 위한 retirement community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후에는 은퇴한 미국 장로교 목사님들 가운데 노후에 갈 곳이 없는 분들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Frank Shu 라는 중국인 실업가는 얼마나 훌륭한 유산을 이 세상에 남겼습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고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에게 헌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다시 에바브로디도 편에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보낸 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영어 성경은 쓸 것을 need로 번역하였습니다. 너희가 나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니, 나의 하나님이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여 주실 것이라고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약속은 힘을 다하여 사도 바울을 도왔던 빌립보 교회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리라”는 말라기 3 10절의 약속은 아무에게나 주신 약속이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according to His riches in glory.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풍성하고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도 그처럼 스케일이 큽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때에 째째하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풍성하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 넘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1년을 더 살게 해준다고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째째하게 1, 2년 수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천국의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거저 은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만군의 하나님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요한복음 1 16절에 보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충만한 데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 받고 또 받고 아무리 받아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가 항상 충만하십니다. 부어 주시고 또 부어 주셔도 영원히 고갈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은혜가 고갈될 때면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은혜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번성할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해가 비치는 날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어려울 때에도 은혜가 필요하고, 부흥할 때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앞 날이 훤히 보이는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질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지어야 할 때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이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이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의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