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 (고후 3:6-18)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을 (Judaizers) 대적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17절에 보면, 그들은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들은 유명한 사람의 추천서를 보이면서, 바울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을 옛 언약의 직분자로 분류하고, 자신과 디모데와 디도 등을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을 받은 자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것이므로, 바울이 유대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직분의 소유자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믿는 것 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믿음에 더하여 율법을 지켜야만, 특히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일종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옛 언약 (율법)의 직분자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먼저 6절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의문과 (the letter, the law) 성령에 (the Spirit) 대입해서 대조합니다. 곧 옛 언약은 돌비에 새기거나 두루마리에 기록한 율법이고, 새 언약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에 기록하신 약속의 말씀,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속담을 인용합니다: the letter kills, but the Spirit gives life. 기록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지만 (7:12), 죄성에 물든 인간들이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이므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죄의 값인 사망을 선고하는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맙니다 (8:2).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성령의 법” (NIV: the law of the Spirit who gives life) 입니다 (8:2).

이어서 7절로 11절은 옛 언약 (율법)의 직분자였던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과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을 비교합니다. 7절과 13절은 출애굽기 3429절로 35절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바울의 주석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계명을 받아 내여 왔을 때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에는 수건을 벗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바울은 13절에서 독특한 해석을 합니다. 곧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자기 얼굴의 광채가 점점 희미해지다가 없어질 것이기에, 그것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수건을 썼다는 것입니다. Moses kept the veil over his face to cover up the fact that the glory was fading (Swindoll). The veil prevented the people from seeing the “finish” of the glory as it faded away (Wiersby). Paul described the glory of Moses’s face as a fading glory. The old Testament passage does not record this fact. It seems that Paul interpreted Moses’s action of covering his face with a veil as an effort on Moses’s part to divert attention from the fading brilliance of his own face (LABC).

또한 7절도 옛 언약 곧 율법의 직분자였던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에 비해서 영 (성령)의 직분은 길이 있을 (영원한) 직분이라고 1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갖고 있던 새 언약의 직분은 율법의 직분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9절은 옛 언약 (율법)의 직분을 정죄의 직분이라고 부르고, 새 언약의 직분을 의의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The glory of the Old Testament Law’s “ministry of condemnation” dims into obscurity in the light of the gospel’s “ministry of righteousness” (Swindoll). God’s old agreement makes us guilty, while God’s new agreement makes us right (LABC).

10절에 보면, 옛 언약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이지요. 그러나 새 언약의 더 큰 영광 앞에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The law really lost its glory when compared to the surpassing glory of the ministry of God’s grace (Wiersby). 아침에 해가 뜨면, 밤길을 비추던 달도 빛을 잃고, 별도 빛을 잃는 것입니다. Although the old covenant was full of glory, the new covenant’s glory is far greater, that the contrast makes it appear as if the old had “no glory because of the glory that surpasses it” (Swindoll).

12절로 18절은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에 대한 민족적 적용과 개인적 적용입니다. 먼저 12절로 13절에서 바울은 모세보다 더욱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을 말씀합니다. 곧 모세의 율법의 사라지는 영광과 달리 영원히 빛나는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4절로 17절은 모세의 수건에 대한 민족적인 적용입니다. 왜 유대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가? The reason? There was a “spiritual veil” over their minds and hearts. Their spiritual eyes were blinded, so that when they read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they did not see the truth about their own Messiah (Wiersbe).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질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14, 16). 그 날에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율법의 멍에로부터 복음의 자유를 누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17).

18절은 모세의 수건에 대한 성도들의 개인적인 적용입니다. 우리가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는 거울처럼 주의 영광을 반사합니다 (reflect).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사, 점점 더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 “()한다는 헬라어는 예수님의 변화산 변형 (transfiguration) 사건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metamorphosis).

The Spirit transforms us! We become more like the Lord Jesus Christ as we grow “from glory to glory.” This wonderful process cannot be achieved by keeping the law. The goal of the old covenant ministry is obedience to an external standard, but this obedience cannot change human character. The goal of new covenant ministry is likeness to Jesus Christ. Legalistic preachers and teachers may get their listeners to conform to some standard, but they can never transform them to be like the Son of God. The Spirit of God writes the Word of God on our hearts, and we obey our Father because of new life He has given us within (Wiersby).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3133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새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을 인간의 생각에 두고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기고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러한 율법은 타율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과 생명을 누리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와 사망이 임하기 때문에 지켜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율법은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 준수의 기준을 최대한 낮추려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율법의 요구는 낮으면 낮을수록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시 올리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자 하였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불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이 옆에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아시다시피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의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 이것을 안 했으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이것을 하였으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멋대로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서 나는 의롭다고 스스로 판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다 지키면 의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리스트가 있습니까? 내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적어도 나를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으리라. 나는 주일날 예배 드리고 헌금 드리고 봉사도 하므로 하나님이 천국에도 들여보내 주실 것이고 이 세상에서도 복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모두 나름대로 나는 여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한 것이다, 그런 기준이 다 있으십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합격점이라고 생각하는 거기까지만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옛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를 예로 들어 보십시다. 속으로 ‘새벽 기도는 왜 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하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열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직분자이기 때문에 나가야 하는데 안 나가고 있다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내가 안수 집사가 되기 위해서 혹은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까 억지로 나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에게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에게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여기까지 하면 하나님께 합격점을 받아서, 천국의 영생과 이생의 복락을 보장받게 되는 기준을 정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기준을 최대한 낮추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미니멈의 기준을 지향하는 태도가 바로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새언약에서는 당신의 법을 우리 마음에 기록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외부에서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역사하는 방향이outside in 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 역사하는 방향이 inside out이 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할 수 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70년대에 이장희 씨가 작곡하여 부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의 주제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래에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남녀 간에도 마음 속에 사랑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한 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너지게 되면 못할 게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매를 맞고 벌을 받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합니다. 하라는 것만 합니다. 미니멈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마음 속에 넘치는 사람은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이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inside out으로 표출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미니멈만 할까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나같은 자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목숨까지 내어 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켜 주십시오, 라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새언약의 직분을 받은 일꾼으로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과 충성을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할 수 없이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끌려가는 옛 언약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중심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깁시다. 나의 헛된 자기 의와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새 언약의 일꾼, 새 언약의 직분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