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꾼 (고후 6:3-10)

 

오래 전에 고등학교 때에, 영어 구문론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구문론은 영어로 syntax라고 하는데, 문장의 구조를 도표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1989년에 고든 콘웰 신학교에 오니까, 신약 교수님 가운데 헬라어 구문론을 강조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성경 해석학에서 제1단계가 문법적 해석이고, 그 다음에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이 뒤따르기 때문에, 일단 헬라어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여야 해석/주석을 바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King James 성경으로 보면, 동사들이 분사 형태로 나옵니다. 3절은 giving no offence (거리끼지 않게 하고)로 시작하고, 4절에는 proving ourselves as the ministers of God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라는 분사가 나옵니다. 이 분사들이 꾸며주는 본 동사는 1절의 권한다 (beseech, urge)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는 바울은 스스로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의 일꾼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4절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면서라는 분사 뒤에는 계속해서 전치사 en (in) 이 나옵니다. 어떤 것 속에서 증명했는가? In patience/endurance (견디는 것 안에서), in afflictions/troubles (환난 속에서), in necessities/hardships (궁핍 속에서), in distresses (곤란 속에서), in stripes/beatings (매 맞음 속에서), in imprisonments (갇힘 속에서), in tumults/riots (폭동 속에서), in labours/hard work (수고로움 속에서), in sleepless nights (잠을 못 자는 가운데), in fasting/hunger (먹지 못 하는 가운데). 바울은 이러한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6절로 들어오면, King James 성경은 전치사를 by로 바꿉니다. 헬라어에는 en이 계속되지만, 의미상 방법 혹은 도구 (tools)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는가? By pureness/purity (깨끗함으로), by knowledge/understanding (지식으로), by longsuffering/patience (오래 참음으로), by kindness (자비함으로), by the Holy Spirit (성령의 감화로), by sincere love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by the word of truth/truthful speech (진리의 말씀으로), by the power of God (하나님의 능력으로), by the weapons of righteousness (의의 병기로써) 하나님의 일꾼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8절로 들어오면, 헬라어의 전치사가 dia로 바뀝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전치사를 through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임이 증명될 때까지 겪는 과정은 양극단적인 것입니다. Through honor and dishonor (영광과 수치를 당하며), through praise and blame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paradox를 표현하기 위해서 헬라어 성경은 ws (as) A kai (yet) B 를 반복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처럼 하나님의 일꾼이 얻는 역설적인 승리를 말씀합니다.

 

요약하면,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래 참으며 말씀과 성령으로 사역할 때에, 결국 역설적인 승리를 통하여 참 하나님의 일꾼임을 증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One of the greatest obstacles to the progress of the gospel is the bad example of people who profess to be Christian. Unsaved people like to use the inconsistencies of the saints – especially preachers – as an excuse for rejecting Jesus Christ. Paul was careful not to do anything that would put a stumbling block in the way of either sinners or saints. He did not want the ministry to be discredited (blamed) in any way because of his life. (Wiersbe)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의 제물 문제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그 점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무당이 귀신에게 바쳤던 고사떡을 먹어도 되냐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믿음의 지식이 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곧 참된 신은 우리 하나님 한 분 뿐이시고, 수 많은 우상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도 부정을 탄 더러운 고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라는 지식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을 바울은 약한 자라고 부릅니다 (고전 8:9-11). 약한 자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약한 자들 앞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는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며 (9),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로 여기는 행동을 하도록 담력을 주는 것이며 (10),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형제를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1). 그러므로 그런 행위는 형제에게 죄를 짓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지식을 갖고 있는 강한 자들에게 주는 지침은 무엇입니까? 약한자들을 사랑으로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공동체에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8:1).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이 죄라고 여기는 사람 앞에서는 삼가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13절에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 문제는 바울이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도 말씀합니다. 14 1절로 13절까지는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직고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14 13절로 15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평적인 관계가 시야로 들어오면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고려 대상으로 들어옵니다. 14 1절로 13절까지만 읽으면, 고기와 포도주를 먹어도 됩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거리낌없이 먹는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다른 사람의 신앙 양심도 생각해 주라고 말씀합니다. 1421절에 보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교훈을 삼고자 하는 두번째는 10절 후반부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계시록 첫 부분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계시록 2 9절에서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네가 가난하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복에는 궁핍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부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9절에 환난과 궁핍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의 궁핍이 그들이 당한 환난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히브리서 10 34절에 “너희가 너희 산업 빼앗긴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원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는 말씀처럼, 서머나 교회 교인들도 재산을 빼앗기는 핍박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소유한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세상 물질은 빼앗겼지만, 하늘에 풍성한 복을 쌓아둔 교회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머나 교회는 진정한 부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서머나 교회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대조가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교회였지만, 주님은 곤고하고 가난한 교회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셨는데,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는 지극히 가난한 교회였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를 넘치게 한 교회였습니다. 그처럼 서머나 교회도 물질적으로 궁핍하였으나, 주님 보시기에 부요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10절에는 서머나 교회에 대한 주님의 권면과 약속이 나옵니다. 먼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닥쳐오는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장차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장차 오는 시험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옥에 집어넣고, 그들이 믿음을 버리도록 시험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0). 이 말씀은 담임 목사 정년 퇴직을 반대하시는 분들이 사랑하시는 구절입니다. 성경에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지요? 서머나 교회는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십 일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기간을 가리킵니다. 십 일동안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순교를 하더라도 신앙의 절개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실제로 지킨 인물이 나중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순교한 폴리캅이었습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입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던 폴리캅을 체포해서 호송하던 장교가 그를 살리기 위해 길에서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재판정에서 딱 한 번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폴리캅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총독이 말합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불경함을 그치라." 그러자 폴리캅이 원형극장을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불경함을 그치시오!" 총독이 다시 말합니다. "내가 당장 너를 석방하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만 해라."

 

폴리캅이 총독에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나에게 한번도 해롭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독이 오른 총독이 소리를 칩니다. "너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느냐?" "맹수들을 불러오시오. 어찌 좋은 마음에서 나쁜 마음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야말로 잔혹함에서 정의로운 재판으로 마음을 바꾸시오."

 

"네가 정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 불에 태워 죽이겠다."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를 태우겠다고 하는 불은 잠깐 타다가 꺼지지만, 영원한 심판의 불이 지금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시오." 마침내 재판정의 관리가 군중을 향해 외칩니다. "폴리캅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백했다." 그러자 군중이 폴리캅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작더미 위에서 폴리캅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보잘것없는 이 종을 오늘 이렇게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게 하시고, 몸과 영혼이 성령의 선물인 영생을 얻는 부활에 참여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순간 폴리캅의 몸은 화염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엄청난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서머나 교회를 부요한 교회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궁핍한 교회였지만,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이며, 끝까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호해 주심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오늘 본문에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여러 가지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죽도록 충성하였더니, 폴리캅처럼 역설적인 승리를 얻었고, 참 하나님의 교회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많은 환난과 궁핍과 곤란이 뒤따릅니다.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성령의 감화와 진리의 말씀과 의의 병기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얻으시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