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는 근심 (고후 7:8-16)

 

오늘 설교 제목은 좀 깁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영어 성경에 보면, 슬픔으로 (sorrow, grief)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10절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Warren Wiersby 목사님이 제구성한 고린도후서 기록 배경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 1년 반 동안 목회하였습니다 (18:1-18).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서 수습하고자 하였고 (고전 4:17), 고린도전서를 기록해서 보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해서, 불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대적하였습니다 (“painful visit,” 고후 2:1 이하).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자, 바울은 혹독한 편지를 써서 (“severe letter”), 디도 편에 보냈습니다 (고후 2:4-9; 7:8-12). 고린도로 간 디도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끝에, 바울은 드디어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하는 편지는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severe letter입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내고 후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 혹독한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근심을 할까를 생각하니, 괜히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힘든 말을 하면, 힘든 말을 한 부모도 힘들지요.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혹독한 꾸중을 하는 편지를 보낸 바울의 심정이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잠시 근심한 후에 곧바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의 심한 꾸중을 듣고 잠시 근심하였으나, 그 근심으로 인하여 회개에 이르렀으니, 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고, 그 근심이 너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잠언 123절을 인용합니다: “나의 책망을 (reproof, rebuke)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꾸짖으실 때에, 당연히 듣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책망이 하늘 문이 열리고 확성기가 내려오면서 우리에게 직접 방송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그럴 때에 잘못하면, 책망을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책망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앙심을 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Few of us associate wisdom and reproof. We often couple reproof and shame. Reproof and embarrassment. Reproof and punishment. Reproof and anger. But not reproof and wisdom! Reproof, another term for rebuke, occurs when somebody points out a fault or flaw. It is not comfortable. It is something extremely painful. But when we listen, it becomes a path toward wisdom.

 

이와 관련하여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부터 지금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고린도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내가 듣는 책망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해 내게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카리스마적인 관계에서의 이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바울이 제가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해? 갔으면 그만이지, 당신이 누구요?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는 것은, 오늘 내가 듣는 책망은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해 내게 주시는 책망이다, 내게 주시는 징벌이다, 내게 주시는 교훈이다, 하고 받아들일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이해입니다. 어떤 말씀을 듣든, 어떤 책망을 듣든, 내가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교훈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거기서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를,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라거나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내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사도 바울이 저렇게 마음 아파하면서 우리에게 이 교훈을 주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충고받는 자가 충고받을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가 충고받는다, 하나님께서 저 분을 내게 보내시어 내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그런데 충고받는 자가 잘못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러냐, 나는 죄인이라고 하자, 너는 죄인 아니냐? 이러고 대듭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영 회개가 없습니다. 이 결과는 사망에 이를 뿐입니다충고를 들으면서 점점 악해집니다. 완악해집니다. 책망을 들으면서 바울을 향하여 도전적인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용 끝).

 

고린도 교인들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고, 나아가서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것이 11절의 내용입니다. 제가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보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른 근심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열심을 일으켰으며, 순결을 변호하게 했으며, 의분을 느끼게 했으며,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으며, 사랑을 사모하게 했으며, 열렬히 헌신하게 했으며, 불의를 징벌하게 했습니까?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이 12절에서 말씀하는 불의를 행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명하였던 근친 상간을 행한 자라는 견해입니다. 두번째 견해는 바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한 사람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한 견해의 근거는 고린도후서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기 때문입니다 (1:12-24, 3:1-6, 4:5-18, 5:11-21, 6:3-13, 10:1-18, 13:1-4).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그 사람은 바울이 painful visit을 하였을 때에, 바울의 권위에 도전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severe letter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또 바울이 누구라고 확실히 지목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근심시키는 불의를 행한 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그 불의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고, 바울이 명한 것처럼 치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순결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혹독한 꾸중을 들었을 때에, 근심을 회개로 바꾸고,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못에 대해서 후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도 뉘우쳤습니다. 마태복음 27 3절로 5절에 보면, 은 삼십을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네가 당하라. NIV 성경은 Thats your responsibility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러한 가룟 유다의 행위를 과연 회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한국말 성경들은 가룟 유다가 뉘우쳤다고 번역하였고, NIV 성경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가룟 유다의 마음이 remorse로 가득 찼다고 번역하였습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뉘우쳤다고 번역된 단어는 회개라는 단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는 metanoia 가 아니라, metamelomai 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regret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이 잡혀가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였습니다. , 내가 잘못했다, 라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회개일까요?

 

가룟 유다의 뉘우침이 참된 회개였는가, 아닌가, 그 여부는 그가 뉘우친 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가를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전에 돈을 다시 가지고 가서 대제사장들에게 무르자고 하였습니다. 거래를 cancel 하자는 것이지요. 거절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그르친 일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자살하였습니다. 자기 멋대로 종결을 지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반성하고, 자기 멋대로 해결을 하려다가 안되니까, 자기 멋대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참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뉘우치기만 하고 회개의 열매가 없는 것은 회개에서 회만 하고 개를 안 한 것입니다. 반쪽 회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배신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닭이 세 번 울 때에 방성대곡하였습니다.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대제사장 집의 문을 지키는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대제사장 앞에서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대제사장이 엄명을 내릴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 4:19). 베드로는 뉘우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행동이 뒤따랐습니다. 방성대곡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회개는 U-Tur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순종의 길로 U-Turn 하는 것입니다. 뉘우치기만 하고, 계속 불순종의 길을 가는 것은 가룟 유다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지만,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제 멋대로 끝냈습니다. 회개란 일차적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면 가룟 유다의 뉘우침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회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삶을 청산하고 순종의 길로 U-Turn 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 43 10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회개한 사람은 증인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죽도록 충성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시다. 회개의 기회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도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바로 너다, it is you, 라는 지적을 받을 때에, 다윗과 같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적하시는 성령님의 경고를 피하지 말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순종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에는 연약하여 주님을 배신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