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Giving (고후 8:1-9)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National Catholic Register 라는 잡지에 실린 Religious People Donate More to Church and Charity 라는 article을 보게 되었습니다. Tim Drake 라는 사람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과 IRS 통계들을 요약해서 재미있는 비교를 하였습니다.

 

미국의 50개주 가운데, 주민들이 가장 도네이션을 적게 하는, 인심이 박한 주가 5개 있는데, 어딘지 아십니까? 뉴햄프셔, 메인, 버몬트, 메사츄세츠, 그리고 로드 아일랜드입니다. 한 마디로, 뉴잉글랜드 지방입니다. 도네이션을 제일 많이 하는 주는 유타입니다. 몰몬 교도들이 십일조를 철저히 해서 그런지, 유타 주민들은 평균 10.6%를 도네이션 한다고 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최하위 뉴햄프셔는 2.5% 라고 합니다.

 

그러면 연수입 5만불에서 7 5천불을 버는 중산층과 연소득 10만불 이상의 상류층 가운데, 누가 더 도네이션을 많이 할까요? 중산층은 7.7%를 도네이션하지만, 상류층은 4.2%밖에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자라고 도네이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도네이션을 많이 할까요? 기본적으로 종교가 있는 사람은 교회나 성당에 헌금을 하니까,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도네이션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종교를 떠나서, 정치적 성향이 liberal인 사람들과 conservative인 사람 중에 누가 더 도네이션을 많이 할까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John McCain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주들의 주민들이 Barack Obama를 지지했던 진보적인 주들의 주민들보다 도네이션을 더 많이 했습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보수인 사람들이 진보인 사람들보다 도네이션을 더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보수층이 (religiously conservative) 도네이션을 가장 많이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이 헌금을 더 많이 할까요, 아니면 작은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이 헌금을 더 많이 할까요? 재적 200 가구 이하의 작은 성당 신도들은 일주일에 가구당 평균 12불을 헌금하는데, 1,200 가구 이상의 대형 성당 신도들은 평균 7.81불을 헌금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도 평균적으로 말하면, 큰 교회 교인들보다 작은 교회 교인들이 헌금도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많이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카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 중에서 누가 더 도네이션을 많이 할까요? 2001년 통계에서 카톨릭은 가구당 1년에 평균 496불을 헌금하였습니다. 한 주일에 10불 정도입니다. 반면에 개신교도들은 1년 평균 1,093불을 헌금했습니다. 한 주일에 20불 정도입니다. article은 개신교도들이 카톨릭 교도들보다 평균 2배 이상 헌금을 하는 이유는 개신교의 십일조 전통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San Diego에 위치한 Wrightsville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교인들에게 보내는 Seagull이라는 월간지에 이런 IRS 직원의 글이 실렸다고 합니다: “나는 어느 날 미심쩍은 세금 보고를 보았다. 그는 수입이 만 불도 안 되는데, 교회에 1248불을 헌금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물론 도네이션의 한계가 수입의 20%를 넘으면 의심하지만, 이 경우는 20%는 안 되었지만,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로 가서 세금보고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사람들은 그럴 경우 대개 긴장하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교회에서 받은 헌금 증명서가 있습니까?” 나는 물으면서 그 사람이 당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물론이지요. 책상 서랍에 모든 서류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교회에 헌금하였던 check까지 모두 가지고 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잘못 짚었구나. 한 눈에 그에게는 하자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세금 공제액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경우에는 조사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나오려는데, 그는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초청하였다. 나는 고맙지만, 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뭐라고요? 정말 교회에 다니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운전하고 오면서 내내 그 말을 생각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주일날 교회에서 평소에 드리던 액수의 헌금을 하는 순간에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

 

무슨 뜻입니까? 그 가난한 사람이 IRS 직원에게 당신이 교인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고 말한 뜻은 무엇이며, 또 그 IRS 직원이 주일날 예배 시간에 헌금을 하면서 그 말의 뜻을 깨달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가난한 사람은 만 불의 수입 중에 천불 이상의 헌금을 한 것이 과다하다고 생각하는 IRS 직원이 교인이라는 점에 놀랐다고 말한 것이고, IRS 직원은 그 말의 뜻을 자신이 헌금을 하는 순간에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는 그 사람에 비해서 훨씬 적은 헌금을 드리면서도, 자신은 정상이고 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은 속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거룩한 강단에서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돈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돈 이야기 가장 많이 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의 6분의 1은 돈 이야기라고 합니다. 유명한 달란트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무지비한 종의 비유, 이 세대의 지혜로운 종의 비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등등이 다 돈 이야기입니다. 요즘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리처드 포스터 목사님은 “헌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An old story tells of a man who, after twenty-five years of marriage, decided to divorce his wife and sadly, she did not resist the idea. While working through the potential division of property for the impending financial settlement, the husband stumbled upon a box of old canceled checks written over the previous couple of decades.

 

There he sat, hunched over the box, thumbing through one canceled check after another until he came across a faded yellow check made out to the hotel he and his bride spent their honeymoon. After remembering the hope of that moment in his life, the husband set the check aside and continued through the box.

 

He didnt get too far before something stopped him again. He grabbed another old check used as an installment of their first car. His pace slowed considerably as one canceled check after another continued to stir up emotionally charged memories of a long-forgotten past a check paid to the hospital at the birth of their daughter, and another for the $2,000 down payment on their first small home.

 

Misty-eyed, the man pushed the box of checks aside and reached for a phone. He dialed his wife. He told her that they had too much invested in those twenty-five years together to just throw them away in the midst of their current hard times. He asked if she would be willing to start over afresh and anew. She agreed, and they began again.

 

If you could go through a familys checkbook or bank statement, we would read the story of their lives. We would find out what that family considers valuable what they live for. Im convinced that the lines in our account ledgers reveal a lot more about our walk with God than the underlines in our Bible. They reveal actual priorities in our lives, the treasures we value most.

 

The fact is, money is not unscriptural or unspiritual. Money can become one of the most important means of expressing our love for the Lord Jesus Christ and our commitment to His eternal work. It can be an objective gauge of the depth of our devotion to Christ. So important is a proper understanding of finances and giving, Paul devotes two whole chapters in this letter to moneys relationship to the ministry.

 

오늘 본문 2절에 연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16 1절에 이미 나왔었습니다. 연보와 헌금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드리는 헌금을 연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연보라는 단어 대신 헌금이라는 단어가 점점 더 많이 쓰이게 된 것 같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는 연보와 헌금이 같은 것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조금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어로 연보는 collection이고 헌금은 offering인데, 성경의 용례들을 보면, 헌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전 헌금함), 연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모금 (fundraising)의 성격을 띄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교인 돕기 구제금).

 

헬라어로 연보는 logeia 인데, 당시 사회에서 정기적인 세금 외에,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부금을 가리켰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logeia의 일반적 용례를 사용해서, 정기적으로 자신의 교회에 드리는 일반 헌금과 구별되는 예루살렘 교회 돕기 모금에 logeia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Swindoll 목사님의 책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logeia collection,” “voluntary contribution: In Greek literature logeia is used to designate occasional contributions to a particular cause rather than regular, systematic taxes. Such contributions may sometimes be related to needs arising from crises or the support of religious orders. In Pauls two uses of the term in 1 Corinthians 16:1-2, he draws on this cultural understanding that the collection was a voluntary offering for the sake of the desperately needy believers in the Jerusalem church. It would be regarded as giving that is distinct from the regular giving to the needs of their own local church.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의 주 목적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교인들을 돕는 구제 헌금을 이방인 교인들로부터 걷었던 사도 바울의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신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실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서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 힘들었던 유대인 크리스챤과 이방인 크리스챤의 다리를 놓고자 함이었습니다. 곧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지체이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에 동참해야 함을 가르치고 실천하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처음에 동참을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말로만 동참하겠다고 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못했습니다. 또한 10절로 11절에 보면, 1년 전에 동참을 원한다고 하면서 시작하였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시작한 것을 성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에 보면,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연보 혹은 헌금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말로 나옵니다. 6절은 시작한 은혜를 완성하라고 말씀하고, 7절에서는 너희가 믿음과 말과 지식과 사랑에 풍성한 것같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은혜라는 단어들은 실제로 연보, 혹은 구제 헌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grace giving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Grace Giving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giving을 실천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grace가 메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grace giving의 모범으로 마게도냐 교회들과 예수님을 들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오늘날 그리스의 북쪽 지방으로서,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교회 등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와 아테네는 그리스 남부 지방인 아가야 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5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새번역으로 읽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힘껏 구제 헌금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힘에 지나게 하였다는 것은 희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의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sacrifice,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요 제사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sacrifice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희생이 들어가야 한다는 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유머 예화를 보았습니다: 어느날 돼지와 닭이 마을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교회 앞에서 며칠 후에 아침 바자가 열린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광고 하단에는 ‘아침 6 30분부터 8시까지 ham and egg serve 됩니다’ 라고 메뉴가 적혀 있었습니다. 닭이 돼지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야, 우리가 교회 바자를 도울 수 있겠다!!!”그러자 돼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계란을 주는 것은 contribution이지만, 내가 햄을 주는 것은 sacrifice.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하여 말씀한 것 가운데 또 한가지 주목하여야 하는 구절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바쳤다는 구절입니다. 창세기 4 4절과 5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물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한 것은 헌신이었습니다. 자신을 먼저 드리고, 그 표시로서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헌금을 바칠 때에,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그가 어렸을 때에 자기 동네에 부흥사가 와서 집회를 하는데, 헌금 시간에 돈은 없고 바치고는 싶어서, 헌금 바구니를 따라 나가서 자신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받으실 때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의 헌금도 받으십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귀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9절에서 주님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것이 grace giving인 것입니다.

 

기독교 성화 가운데 Ecce Homo 라는 제목의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Ecce Homo 라는 제목으로 1634년과 1661년에 두 번 작품을 내었습니다. 에케 호모란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9 5절에서 빌라도가 한 말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이었으므로 라틴어로 말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5절을 라틴어 성경인 Vulgate 성경으로 보면, ecce homo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Ecce Homo 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하였는데, 그 중에 Sternberg 라는 독일 화가도 있었습니다. 몸이 온통 망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의 손에 이끌려 군중 앞으로 나와 서 있는 모습입니다. 슈테른베르크는 그 그림 하단에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는 글귀를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 헤버갈 (Frances Havergal, 1836-1879) 이라는 영국의 찬송 작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찬송가를 많이 지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녀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슈테른베르크의 Ecce Homo 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 그림 아래 적혀 있는 글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그녀는 이 글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아마 날마다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틈틈히 찬송시도 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림 아래에 쓰여 있던 그 글귀가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겹쳐지면서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기도한 후에 찬송시를 한 편 적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찬송가 185)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극히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연보를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고린도는 부유한 항구 도시로 교역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족한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달동네와 같은 마게도냐에서 훨씬 더 풍성한 연보가 걷혔습니다.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헌금은 헌신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극한 가난의 고통 가운데서 넘치는 헌금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자, grace giving을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