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의 유익 (고후 12:1-10)

 

이번 학기부터 이 장로님이 초원지기로 목장 모임을 지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두 번 목자/부목자/교사 교육이 있었습니다. 첫 시간에 나누어 주신 목장 메뉴얼을 보면서, 제가 전적으로 동의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말로 이야기해도 어차피 고쳐지지 않는다. 그냥 기도하고 견뎌라. 가르치고 치유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임을 인식하고, 믿고 기다린다.

 

그리고 메뉴얼에서 두 번 반복되는 중요한 내용이 있었는데, 목장을 인도하는 사람이 피해야 할 가장 나쁜 태도는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더가 목원들이 나누는 의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이라고 일일이 지적하고, 목원들이 삶을 나눈 것에 대해서 잘못 행동하신 것이니 회개하라고 하면, 다 도망갑니다. 그리고 장로님이 리더의 태도에 대해서 강조하신 점은 리더가 자신의 약함을 오픈할 때에, 목원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오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치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 16절 이하에 보면, 자기가 육체적 (fleshly 인간적) 자랑을 좀 하겠다고 하면서, 그런 자랑을 하는 자신을 fool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고린도후서 11 16절로 21절에서 바울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새번역): 나를 어리석은 사람 (fool) 으로 받아 주셔서, 나도 좀 자랑하게 놓아 두십시오… 내가 이제 하는 말은 어리석음에 빠져서 자랑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게 하는 말입니다…많은 사람이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내가 어리석은 말을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히브리 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 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 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함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한 마디로 나처럼 주의 일 하면서 고생한 사람 있으면 한 번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 17절에 보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씀하는데, 바울이 그처럼 매 맞고 고문당하면서 생긴 상처라고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자랑들, 곧 자신의 지난 온 가시밭 길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2 1절 이하에서 또 다른 자랑을 시작합니다. 곧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3인칭을 사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2-4).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자랑이 무익한 것이라고 1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무 쓸모 없는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번 바울은 빌립보서 3 4절로 6절에서 인간적인 스펙을 자랑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의 그런 자랑 거리들을 육체적인 신뢰라고 부릅니다 (confidence in the flesh):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 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3:5-6).

 

다시 말해서, 그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족보가 확실한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유전에 대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신학자였습니다 ( 22:3). 나도 집안과 학력과 경력으로 보면, 유대인으로서 어깨에 힘줄만 하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특심해서 예수 이단들이 다니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빌립보서 38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그 모든 자랑들이 다 쓰레기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 9 23절 이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의 가시 혹은 사단의 사자라고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안질일 것이다 혹은 간질일 것이라고 추측만 무성할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사자라고 하였으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었던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사도가 사역에 방해되는 사단의 가시를 몸속에 가지고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에게서 이 가시를 제거하여 주십시오, 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단의 사자입니다. 이것이 없어져야 제가 더 힘 있게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간절한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은 하나님이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으시는 이유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 가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거기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몸속에 주신 장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더 적극적인 가시의 기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9절의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네가 약함으로 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기쁨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나는 강하게 된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의 약함을 놓고 기도할 때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강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강한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에,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약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신의 약함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 거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발은 착고에 채워져서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극히 약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가장 약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지진이 나며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매인 것이 풀어지고, 간수가 와서 두려워 떨며 복음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8장에서 설교하기를, “너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우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여 아무 걱정이 없어질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곧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신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사사기 23절에,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좀 편안할 만하면 옆구리를 찌르는 가나안 족속들, 왜 하나님은 저들을 다 몰아내지 않으시고 일부러 남겨 놓으셨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자고하지 않도록, 늘 전쟁의 능력을 갖춘 강한 민족이 되도록,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 남겨두신 가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교만하지 못하도록 가시를 하나씩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고 기도할 끈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도록 치는 부정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가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Norman Vincent Peale 목사님은 당신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자산 (asset)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은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되고, 자신을 늘 돌아보며 경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를 통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은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 자랑은 육체의 자랑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육체의 자랑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여기서 고통 당한 것은 너의 죄 때문이다. 나는 너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렸다. 네가 받을 저주를 내가 받았다. 너의 죄 값을 내가 치렀다. 네가 죽을 자리에서 내가 죽었다.” 그처럼 십자가는 내가 죽을 죄인이요, 저주받을 죄인이요,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만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점이 많지만, 나는 언제나 옳다는 self-righteousness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너는 지옥 불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모욕을 느끼고 화가 나겠습니까? 더군다나 너의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고 죽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1 23절에 보면,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형틀이었습니다. 형틀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단두대나 교수형이나 lethal injection 같이 고통 없이 죽이는 신사적인 사형틀이 아닙니다. 몇 날 며칠 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가하며 서서히 죽이는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은 절대로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극악범들을 본보기로 처형하는 극악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런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라는 것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이야기였습니다 (고전 1:22-23).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그런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서 몸부림 치며 신음하며 피를 흘리며 살이 찢기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몸을 찢기시며 피 흘리신 십자가는 보기에도 끔찍하고 험하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증거합니다. 성찬을 통하여 기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그치고,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십자가 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