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간의 법정 고소 (고전 6:1-8)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5장에서는 근친 상간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6장에서는 교회 내의 형제를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에 한국 장로교 고신측은 법정 고소의 문제로 고소파와 반고소파로 교단이 분열되기까지 했었는데, 오늘 날은 한국 전체의 민사 소송의 20%가 교회에 관련된 건이라고 합니다. 변호사 비용이 비싼 미국의 이민 교계에도 몇 백 만불씩 소송 비용을 지출하는 교회도 있고, 교단이 소송에 휘말려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각 교회에서 내라고 요구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을의 송사 문제를 회당에서 다루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해결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공회가 나옵니다.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은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법원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의회에 호소하였습니다.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구약의 전통도 아니고, 신약의 전통도 아닙니다. 물론 바울이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그것은 교회 내에서 형제 간에 일어난 문제로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은 유대/기독교의 전통이 아니라, 헬라의 문화였습니다. 법정이 없는 곳은 헬라 땅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헬라인들은 (the Greeks)배심원의 (jury)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법정 문화는 로마로 이어졌습니다. 로마하면 법입니다.

 

오늘 날 미국은 그러한 Greco-Roman 전통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lawyer 숫자가 2016년 기준으로 1.3 million 이 넘는데, 매년 늘고 있다고 합니다. I will sue you 라는 말을 주변에서 흔히 듣습니다. 또한 일반 시민들이 법정에서 유죄와 무죄를 판결하는 배심원제도 역시 헬라의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형제라는 단어와 성도라는 단어 입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가 같은 교회의 형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의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히 헬라의 관습이 교회에서도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성도는 영어로 saints인데, 장차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할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2, 3). 곧 주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은 주와 함께 보좌에 앉아서 ( 3:21), 심판하는 권세를 받게 될 것입니다 ( 20:4). 성도들은 주와 함께 다스리며 왕 노릇 할 것입니다 (딤후 2:12). 그처럼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들을 심판할 권세를 가진 성도들이 불신자 판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피차 송사하는 것은 완연한 허물이라고 말씀합니다. 허물을 NIV fault로 번역하였고, King James defeat로 번역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불신자 재판관에게 가서, 누구 옳고 그른지를 재판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 판결에 순복하는 것은 성도로서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패배라는 것입니다. 교인끼리 싸울 때에 승자는 오직 사탄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집니다. Nobody really wins – except the Devil!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면,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고 말씀합니다 (2):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5). 성도 간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 판단해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혀 존경을 받을 수 없는 불신자 재판관에게 가서,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는 세상 재판관에게 판단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왜 세상 법정에 호소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재판이 불신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 재판에는 법적인 전문성이 떨어집니다. 목사님들이 법 조문을 따지는 일에 서툽니다. 그리고 교단 정치에 많이 좌우됩니다. 또 자기 교회 목회 하기도 바쁜데, 언제 남의 교회 일을 자세히 알아보고 바로 판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졸속 판결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총회 재판국의 최종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7절에 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형제 간에는 손해를 보고 참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 믿고 맡기면,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시면, 아무런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없고, 서로 원수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지 않으며, 교회의 명예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는 눈,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 대라.” 예수님은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 19절은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창녀를 돌로 치려는 군중들에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치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심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심판주는 하나님 홀로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벌을 내려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평생 동안 사랑만 하고 축복만 하고 악을 선으로 갚는 일만 죽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진 일만 달란트의 사랑의 빚을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천벌을 내릴 사람에게 천벌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 7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원수의 뺨을 치신다고 했습니다.

 

Alfred Plummer라는 분이 선과 악의 상관 관계를 아주 멋지게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 선을 행한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방법이다. 그리고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바리새인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계시록 20 11절에 보면, 최후의 심판석은 크고 흰 보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을 백보좌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 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고, 요한복음 5 22절에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계시록 20 12절에는 심판의 대상이 나옵니다: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죽은 자들이 모두 심판의 대상입니다. 여기 무론대소라는 표현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출세하였던 사람이나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이나 다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백보좌 앞에 서야 합니다. 히브리서 9 27절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19세기 미국 대부흥을 주도한 찰스 피니 목사님은 본래 법대를 졸업하고 뉴욕의 어느 법률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님이 그의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변호사 개업을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거냐?’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거냐?’ ‘은퇴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뭘 할 거냐?’ ‘죽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얼 할 것이냐?’ 찰스 피니는 벌벌 떨면서 말했습니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심판대 앞에 선 자신을 바라 보았습니다. 자신의 유익 만을 위하여 살았고,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아온 일생에 대하여 심판 받는 자신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는 이후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인생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습니다. 죽은 다음에 받을 심판을 의식하며 산 찰스 피니의 나머지 50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삶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삶이었습니다. 주님이 내 삶을 회계하실 때를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의 삶도 훨씬 질적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계시록 20 12절은 심판의 원리도 말씀합니다: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절에 또 다시 말씀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으니.” 심판의 기준은 행위입니다. 마태복음 12 36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 10절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산 사람을 다 계산하면 6백억 명은 될 것인데, 무슨 재주로 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다 기록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도 말을 녹음하고 행동을 촬영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술로도 손바닥만한 디스크 한 장에 수백 만 명의 인적 사항을 다 입력하고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자료를 끄집어 내서 뽑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과 모든 행동과 모든 은밀한 것까지 다 아시고, 녹음하시고, 촬영해 놓으시고, 그 모든 것이 기록된 책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회개하는 자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깨끗이 지워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다 씻어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 우리의 모든 행동, 우리의 잘못이 다 기록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0장에는 행위의 책 외에 또 하나의 책이 나옵니다. 12절과 15절에 나오는 생명책입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 생애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조차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감격을 잃어 버렸습니다. 월급이 올랐다고 좋아하고, 성적이 잘 나왔다고 좋아하고, 장사가 잘 된다고 좋아하지만, 영생의 축복에 감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70인에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어서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기쁨으로 보고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20).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이유는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저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다는 보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은 세상을 빨리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체적으로 부자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참한 인생인 것입니다.

 

계시록 20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 보면, 불과 유황 못에는 마귀와 짐승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불못에 던지운 자들은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최종 판결입니다.

 

어떤 전도지의 겉장에는 “당신이 지옥에 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 해답은 뒷면에 있는데, ‘아무 할 일이 없다’ 라고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저절로 지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두려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불못에 던지우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 14절은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악인이 죽으면 음부에 간다고 말씀합니다. 음부란 기다림의 장소입니다. 13절에 보면,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를 내어준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죽음을 경험하고 음부에서 대기하던 자들이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여러분은 최후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친히 보복을 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 목장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들이 평화스럽게 풀을 뜯다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엄청난 싸움 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어떤 소가 옆의 소를 발길로 한 대 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난데 없이 한 대 맞은 소는 즉각 반격을 가합니다. 반격을 받은 소는 더 세게 들이 받습니다. 흥분한 소는 실수로 제3의 소를 들이받습니다. 난데없이 한 대 맞은 소는 즉각 반격을 가합니다. 반격을 받은 소는 더 세게 복수합니다. 흥분한 소는 실수로 제4의 소를 들이 받습니다. 금새 온 목장이 싸움 바다가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싸움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대 맞은 소가 묵묵히 참고 견디면 됩니다. 반격하지 않으면 됩니다. 비록 소 귀에 경 읽기라고 했지만, 그래도 성경 말씀을 들었으면, 돌아서서 그 소를 용서하고 축복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못되게 구는 소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자가 가만 있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12:19). 성도들이 교회 일로 세상 법정에까지 가서 싸울 때에, 세상은 교회를 비웃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치리하시도록 인내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