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희생에 보답하는 헌신의 마음으로 기도한 새벽이었습니다. 순서를 담당해 주신 4목장에 감사드립니다. 서지원 청년이 만든 청년부 특새 출석표를 보면, 감탄스럽습니다 .

장년: 함대옥, 장성진, 우정희, 노난실, 전영숙, 김혜원, 이기호, 이방섭, 주원열 (9명)

청년: 장경수, 서지원, 전재현, 정호웅, 김규리, 신진실, 나예진, 하우석, 이예지, 한민식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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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유를 드린 과부 마가복음 12:41-44

오늘 본문에 41절에 보면,”예수께서 연보 궤를 향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지나치면서 보신 것이 아니라, 성전의 연보 궤 앞에 자리 잡고 앉으셔서 여러 사람의 헌금하는 모습을 관찰하셨습니다. ‘보실새’ 라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한 동안 지속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한 동안 계속 지켜 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성전에는 13개의 연보 궤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지폐는 없고 동전만 있었습니다. 연보 궤는 동전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입구가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보 궤는 나무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전을 넣으면 쨍그랑 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큰 동전을 넣으면 큰 소리가 났습니다. 동전을 많이 넣어도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헌금을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렙돈은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의 화폐 단위였습니다. 모두 가장 작은 최소 단위였습니다. 렙돈에는 얇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던진 렙돈은 너무 엷고 가벼워서 쨍그렁 소리도 안 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 속에서 온전한 헌신을 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이런 유머스러운 예화를 보았습니다: 옛날에 돼지와 닭이 마을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교회 앞에서 며칠 후에 아침 바자가 열린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광고 하단에는 ‘아침 6 30분부터 8시까지 ham and egg serve 됩니다’ 라고 메뉴가 적혀 있었습니다. 닭이 돼지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야, 우리가 교회 바자를 도울 수 있겠다!!!”그러자 돼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계란을 주는 것은 contribution 이지만, 내가 햄을 주는 것은 sacrifice.

예수님이 보신 부자들은 말하자면 많은 달걀 중에 하나를 기증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 돈은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은 희생이었습니다. 영어로 제물이나 제사는 모두 sacrifice 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로도 제물은 희생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희생, 그 헌신을 보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곤란을 겪고 있을 때에,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에게 구제헌금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많은 헌금을 한 교회는 가장 가난하였던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 1절에서 5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새번역으로 읽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힘껏 구제 헌금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힘에 지나게 하였다는 것은 희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의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sacrifice,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요 제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도 엄청난 희생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모두 바쳤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하여 말씀한 것 가운데 또 한가지 주목하여야 하는 구절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바쳤다는 구절입니다. 창세기 4 4절과 5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물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한 것은 헌신이었습니다. 자신을 먼저 드리고, 그 표시로서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헌금을 바칠 때에, 먼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화 가운데 Ecce Homo 라는 제목의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Ecce Homo 라는 제목으로 1634년과 1661년에 두 번 작품을 내었습니다. 에케 호모란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9 5절에서 빌라도가 한 말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이었으므로 라틴어로 말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5절을 라틴어 성경인 Vulgate 성경으로 보면, ecce homo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Ecce Homo 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하였는데, 그 중에 Sternberg 라는 독일 화가도 있었습니다. 몸이 온통 망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의 손에 이끌려 군중 앞으로 나와 서 있는 모습입니다. 슈테른베르크는 그 그림 하단에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는 글귀를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 헤버갈 (Frances Havergal, 1836-1879) 이라는 영국의 찬송 작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찬송가를 많이 지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녀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슈테른베르크의 Ecce Homo 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 그림 아래 적혀 있는 글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그녀는 이 글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아마 날마다 큐티도 하였을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틈틈히 찬송시도 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림 아래에 쓰여 있던 그 글귀가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겹쳐지면서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기도한 후에 찬송시를 한 편 적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찬송가 185) 

우리도 하나님께 최상의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온전한 헌신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가난한 과부와 같은 귀한 헌신의 마음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