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며 기도한 성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올해는 고난주간과 Brown/RISD 봄방학이 겹쳤지만, 남아 있는 청년들이 끝까지 특새에 힘써 참석하였습니다. 

장년: 함대옥, 우정희 , 장성진, 노난실, 김영희, 이기호, 이방섭, 주원열 (8명)

청년: 김태희, 정연오, 이상엽, 한민식, 최지원, 서지원, 이예지, 김규리, 나예진, 신진실, 조은비, 장한나, 전재현, 하우석, 이윤호, 오영근, 정호웅 (1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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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 ( 15:6-15)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바라바가 자리를 맞바꾼 기사입니다. 바라바가 죽을 자리에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바라바는 예수님 덕분에 죄 사함을 받고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바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살인자요 강도였던 사형수 바라바는 졸지에 석방이 되고, 죄 없는 예수님이 그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는 기 막힌 상황이 연출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공회를 열고 예수님에 대해서 종교 재판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했습니다. ( 14:62).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참람하도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저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왔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들은 부정을 타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서 재판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이 계속 나옵니다. 빌라도는 관정 밖에서 유대인들의 고소를 듣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님은 종교적인 시기심으로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15:10). 그들의 동기를 알고 있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일에 휩싸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미룹니다 ( 18:31).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행악자를 당신의 손으로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심문한 결과가 나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18:38).

누가복음 23장의 기사를 보면, 빌라도는 세 번이나 이 사람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까? 그 해답은 마태복음 27 24절에 있습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당시는 유월절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모이는 인파의 치안을 유지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군사들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빌라도에게는 약 삼 천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하지만, 유원절 인파가 민란을 일으키면 도저히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로마에 반기를 드는 민란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치안을 신경 쓰고 있던 빌라도 총독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러한 최종 판결을 내리기 전에, 유월절에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 케이스로 놓아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 17절에 보면, 빌라도는 자기의 권한으로 후보자 두 명을 선정해서, 바라바라는 강도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놓아 주기 원하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어봅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마태복음에는 바라바가 유명한 죄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가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당연히 흉악범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충동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가 되묻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군중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묻습니다: “어찜이뇨?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 15:11-14)

          이 군중들은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환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로 영접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군왕적인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 앞에 펼쳤습니다. 예수님은 전쟁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정치적 해방을 가져올 군왕적인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희망은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권력자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법정에서 빌라도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하였습니다. 저게 무슨 메시야란 말인가?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라고 선동할 때에, 군중들은 주저 없이 저 패배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차라리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면이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한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부와 권력을 주실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과 출세와 명예를 주시기를 소망하였는데, 하나님은 나의 그러한 인간적인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별로 관심 없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나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나의 자녀가 되라, 천국의 백성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 보다 높아지고 싶은데, 하나님은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너는 죄인이니,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나에게 가까이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차라리 나에게 부와 권력을 가져다 주는 힘 있는 강도가 있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보다 차라리 그 강도, 내가 원하는 성공과 출세를 이루어 줄 강도를 택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러한 선택을 할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바라바를 택하였던 군중들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참 의미 심장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bar는 아들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abba는 아빠입니다. 그러므로 바르 아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바라바는 이 세상에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났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강도 바라바는 모든 죄인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이름은 바라바였습니다. 우리 모두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바라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바라바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상징적인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신 대속의 사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바라바는 평생 예수님이 생각 났을 것입니다. 자기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여러 번 주님을 기억한다고 해도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께 빚진 자입니다.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아무리 여러 번 감격하며 감사한다고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천국에 불러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은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 7:10).

나의 자리에서 내가 받아야 할 고통과 심판과 죽음을 감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고, 나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내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성금요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