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의 위로 (고후 1:1-11)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때에 개척하고 1년 반 동안 목회한 교회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제3차 전도 여행 시에 3년 동안 머물렀던 에베소에서 기록된 것이고, 고린도 후서 역시 제3차 전도 여행 시 마게도니아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는데, 거기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고 봅니다. Warren Wiersby 목사님은 고린도후서의 기록 배경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합니다:

        He had founded the church at Corinth and had ministered there for a year and a half (Acts 18:1-18). When serious problems arose in the church after his departure, he sent Timothy to deal with them (1 Cor. 4:17) and then wrote the letter that we call 1 Corinthians. Unfortunately, matters grew worse, and Paul had to make a “painful visit” to Corinth to confront the troublemakers (2 Cor. 2:1 ff.) Still no solution. He then wrote a “severe letter,” which was delivered by his associate Titus (2 Cor. 2:4-9; 7:8-12). After a great deal of distress, Paul finally met Titus and got the good report that the problem had been solved. It was then that he wrote the letter we call 2 Corinthians.    

        고린도후서의 중심 단어 (key word)는 위로 (comfort, encouragement) 입니다. Warren Wiersby목사님은 그의 고린도후서 강해의 제목을 Be encouraged: God can turn your trials into triumphs 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위로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 동사형은 parakaleo 이고, 명사형은 paraklesis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을 parakletos (보혜사, comforter) 라고 부르셨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옆에서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영어 성경에서는 세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counselor, comforter, helper. 예수님이 성령님을 paralketos 라고 명칭하실 때에, 그러한 의미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Comforter에는 fortis라는 라틴어 어근이 들어 있습니다. Fortis는 힘과 용기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는 분입니다. 침체한 심령, 상한 심령, 낙심한 마음을 보시고, ‘얼마나 힘드냐,’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해 주십니다. 보혜사 되시는 성령님은 그처럼 우리를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중보 기도해 주시고,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위로를 주시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찬송하리로다라는 찬양 (doxology) 으로 시작합니다 (3). 바울은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겪었다고 8절로 9절에서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전에 거쳐 온 에베소를 비롯한 아시아 지방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라고 생각될 정도의 환난을 당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찬양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서 찬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감사 드리세라는 제목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20). 찬송가 해설집에 보면, 이 감사 찬송은 큰 역경 중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찬송가는 Martin Rinkart 라는 독일 목사님이 1637년에 30년 전쟁 (1618-1648) 의 와중에 지은 것입니다. 그 해에는 특별히 기근과 질병이 극심해서 Rinkart 목사님은 기록적으로 4,480명의 장례식을 집전하였는데, 그 중에는 목사님의 부인도 있었습니다. 그 참담함과 슬픔 가운데에서, 창문 밖에서는 공포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가운데, 그는 자리에 앉아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감사의 찬송을 지었습니다.

영어 가사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 마음과 목소리를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로 인하여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머니의 손에 있을 때부터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선물을 지금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Rinkart 목사님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드린 그러한 감사는 장성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성숙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환난 (affliction) 혹은 고난 (suffering) 이라는 단어도 7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그가 당한 환난과 고난을 고린도후서 1123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옥에 갇히기를 (저희보다) 더 많이 하고,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그러한 환난 속에서 위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후에, 자신이 그처럼 환난과 고난 속에서 위로를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로, 4절로 7절에서는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위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나바와 같이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다 (4:36). 성령 충만한 교회는 하나님의 위로를 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에게 이러한 환난이 닥치냐고 원망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극심한 환난 중에도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라헬이 자식이 없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시편 772절에 보면, 나의 환난 날에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극심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drunk driver 뺑소니 차량에 치어 죽었는데,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이 괴한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누가 위로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젊은 아내를 암으로 먼저 보낸 사람에게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말씀도 그럴 때에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환난을 당한 욥을 찾아 온 친구들이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했지만, 욥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환난을 경험한 사람이나, 그보다 더 심한 환난을 경험한 사람이 와서 위로를 한다면, 따로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고, 살 소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고생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주님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시편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다윗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A perfect contemporary example is Joni Eareckson Tada. When a diving accident in 1967 instantly transformed Joni from an energetic girl to a woman confined for life to a wheelchair, some no doubt thought her productive life had ended. Surely, countless people around her asked the haunting question, “Why?” But the Lord used her horrible experience to minister to countless lives with the hope-filled, healing message of Christ. (Swindoll)

마찬 가지로, 바울처럼 고난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고 4절은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남이 겪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지금 극심한 환난 가운데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자로 삼으시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고,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두번째 목적은 9절에 나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난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는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줍니다. 고난의 영적인 유익은 더 이상 연약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 만을 의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주제가 encouragement 라고 하였습니다. 반대말은 discouragement (낙심) 입니다. 성령님은 comfortencouragement를 주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마귀는 낙심케 하는 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하루는 졸개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무찌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퀴즈를 내었습니다. 졸개들은 저마다 돈, 명예, 미움, 시기, 질투, 정욕, 음란, 교만 등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왕초 마귀는 가장 좋은 무기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낙심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낙심만 시킨다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낙심할 때에 영적인 전쟁에서 싸우기도 전에 지고 맙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를 우리는 민수기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정탐군이 가나안 땅을 다녀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 중에 10명의 정탐군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담시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땅 성읍은 견고하고 거민은 강하다. 그들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대장부들이니,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았다.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소리높여 울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반대의 보고를 합니다. “빨리 올라가서 취하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열두 정탐군은 똑같은 땅을 똑같이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정반대의 보고를 하였을까요? 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10명의 정탐군의 보고가 더 객관적인 평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늘 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10명의 정탐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으로 인하여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행한 이적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가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왜 낙심합니까? 믿음의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군사와 말과 병거로 성을 에워 쌓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할 때에,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게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함으로 사환은 산에 가득 둘린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낙심을 이기게 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신앙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 8절 이하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난관이나 역경이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승리할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역경 가운데 낙심치 아니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고,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죽을 것 같은 고난을 허락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을 낙심시키는 환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문제로부터 주님에게로 옮기십시오.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면 볼수록 문제는 점점 커집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고 문제만 보이게 됩니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바라 보셔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저 땅으로 인도하시리라.” 여호수아와 갈렙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