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은사에 감사 (고후 9:1-15) Thanks for His Unspeakable Gift

 

고린도후서 9장은 8장에 이어서 연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곧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에 동참해 달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로 5절의 내용을 보면, 입장이 곤란해진 바울이 자기 체면도 좀 생각해 달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1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큰 소리치며 나섰기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니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열심을 낸다고 자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게도니아 지방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에 자극을 받고 격동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어떠한가? 처음에 큰 소리 치면서 열심을 내었던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의 안 했고, 바울로부터 고린도 교인들이 열심을 낸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은 마게도니아 지방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과 시련 가운데에도 풍성한 연보를 한 것입니다 (8:2). 마게도니야 지방 교인들은 힘써 바쳤을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드렸습니다 (8:3). 그들은 한 마디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8:4). 그래서 바울은 이제 꺼꾸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게도니야 교인들을 본받으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난처한 입장을 호소합니다. 이제 내가 마게도니야 교인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터인데, 너희가 연보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게 된다면, 그것은 너희의 수치일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본받으라고 했던 나의 수치가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9:4). 그리고 그런 민망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사단을 미리 고린도에 보내서, 너희가 일년 전에 약속한 연보를 속히 이행하라고 당부하게 된 것입니다 (9:5).

 

6절부터는 연보/헌금의 일반적인 원리를 말씀합니다. 먼저 6절은 심음과 거둠의 원리를 말씀합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는 원리는 농사에 적용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26편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갈라디아서 6 9절과 10절은 선행 곧 착한 일의 씨를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하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선행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심는 자에게는 축복이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끼치고, 후손들에게는 축복의 유산으로 전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착한 일에 대하여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행을 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열매를 거둘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치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헬라어로 ‘시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크로노스의 인간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의 “때”는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갈라디아서 4 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의 “때”도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대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늦습니다. 우리는 급하지만,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분변하는 지혜를 구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열매가 빨리 맺히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때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추수군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추수의 비젼을 바라보며, 열심히 씨를 뿌리며 많이 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즐겨 내는 자는 영어로 cheerful giver입니다. 억지로 마지 못해서 내는 자의 반대말입니다. 출애굽기 252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재료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라고 명하시면서,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는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 2절은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자원함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라,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백성들에게 오늘 날로 말하면 건축 헌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9절에 보면,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14절에서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출애굽기 35 21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36 5절에 보니까,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성막을 짓는 재료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지고 오라고 명합니다.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드리는 것으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충만하였던 초대 교회도 그러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 32절 이하에 보면, 교인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면, 자기의 재물이 더 이상 자기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바칠 것인가, 그런 관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의 마음으로 물질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돈을 사랑하는 탐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믿음은 그 사람의 헌금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심을 강조했던 죤 웨슬레는 “진정한 회심은 돈 지갑이 회개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음으로 9절로 10절은 구제와 의를 연결시킵니다. 9절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자의 의는 영원하다는 시편 1129절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10절은 연보, 곧 구제 헌금을 심는 자에게 의의 열매를 더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히브리어로 구제와 의라는 단어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체다카입니다. 헬라어로도 디카오수네 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1절을 King James너희 구제를 사람 앞에 보이지 말라고 번역하였고, NIV너희 의로운 행위를 사람 앞에 보이지 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구제 헌금 (연보)의 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11절과 12절과 13절을 보면, 각 절마다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감사’ (11),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 (12),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구제는 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들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감사와 영광을 가로 채는 것입니다. 구제 헌금을 받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구체적으로 누가 주는 돈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에 대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과장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반신불수 환자나 극심한 치매증 환자가 아니고는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하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모르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스스로에게도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도 기억하지 말고 잊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마음 속 깊숙이 뿌듯한 마음을 간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부심은 곧 자만심으로 인도하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라도 나 잘했다고 마음 속으로 박수를 치지 말아라. 혼자만의 비밀 장부에 적어 놓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요, 스스로에게 바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5절에 보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씀으로 연보에 대한 긴 권면을 마감합니다. 연보는 grace giving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 만이 즐겨 내는 자가 될 수 있고, 자신을 드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찬송가 2071절 가사가 기억납니다: “주 나에게 주시는 은혜가 크도다. 그 대속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니, 이 타락한 죄인이 중생케 되었네. 그 넓고도 큰 사랑 나 어찌 말하랴.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15절에 대해서 이렇게 강해하였습니다: “Thanks to be to God for His indescribable gift!” (9:15). The perfect picture of grace God has placed throughout Scripture is Jesus Christ hanging on a rugged cross. Can you turn away from such a picture of love, such a picture of giving, such a picture of amazing self-sacrificial grace? Can you look at such a picture and not be changed, not be compelled to give yourself to Him, not be compelled to give to others in the way He gave Himself to you?

 

스펄쳔 목사님은 고린도후서 915절에 대한 설교에서, 어떤 믿음 좋은 부인의 신앙 간증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I remember one dear lover of Christ who wished to join a certain church, but her testimony of experience was very slender. Indeed, she said too little to satisfy the brethren who came to speak with her and they told her so. When, bursting through all bonds she finally cried out, “I cannot speak for Him, but I could die for Him.”

 

스펄쳔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면,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바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위해 사십시오.

 

그리고 이미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다면, 여러분의 물질도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아낌없이 바치십시오. 눈먼 것이나 저는 것을 바치지 마시고, 소떼나 양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서 바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세금을 내듯이 하지 말고, 기쁨으로 사랑의 예물을 바치십시오. 하나님께 즐거이 내십시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돈으로 향기로운 것을 사서 그분께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희생물 중에서 기름을 취하여 그분께 드리십시오. 우리의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즐거이 옥합을 깨뜨릴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에서 그 옥합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거룩한 헌신의 행위들로 가득 차게 하십시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사도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연보한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또 물질을 바칠 때에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여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8:9).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9:7).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연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명예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연보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는, 의무감에서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는 연보입니다. 아까운 마음으로 하였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내가 얼만큼 연보를 하였다고 하는 자기의에 (self-righteousness)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보는 하나님께 열납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세째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연보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감사함 가운데, 자원하여 즐겨 내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과 같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헌신의 표로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사,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9:8).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자원하여 바치는 일은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우리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헌금은 헌신의 표현입니다. 비록 내가 드리는 것이 작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성소의 일부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사용되게 하소서, 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하늘 나라 성소에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존전에서 영원히 보전됩니다. 천국의 성소를 지어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