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자랑, 칭찬 (고후 10:7-18)

 

고린도 교회 내에 침투한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 온갖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아마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고린도후서 115절로 20절에 보면, 고린도에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을 바꾸는 사람이라고 비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절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추천장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 상고한 102절에 보면, 바울은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곧 자기 탐심을 채우려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외모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에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주석에 바울의 외모에 대한 주후 200년 경의 자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A description of Paul’s personal appearance has come down to us from a very early book called The Acts of Paul and Thecla, which dates back to about A. D. 200. It is so unflattering that it may well be true. It describes Paul as “a man of little stature, thin-haired upon the head, crooked in the legs, of good state of body, with eyebrows meeting, and with nose somewhat hooked, full of grace, for sometimes he appeared like a man and sometimes he had the face of an angel.” A little, balding, bandy-legged man, with a hooked nose and shaggy eyebrows—it is not a very impressive picture.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왕을 버렸으므로, 이제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이다. 이스라엘의 새 왕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 내가 이미 택하여 놓았으니, 너는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왕으로 택하셨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새의 아들들을 모두 제사에 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맏아들 엘리압을 보자 마자, 바로 이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맏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와 신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주님은 heart를 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또 다른 아들이 있냐고 물어서, 멀리 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양을 치고 있던 막내 아들 다윗을 불러서 왕으로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스펙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쓰신 <제자훈련 열정 30>이라는 책에 감동적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빈손으로 떠나 천국을 가진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수정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은 1982년에 35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1947년생쯤 되는 분이었습니다. 옥 목사님이 사랑의 교회 전신인 강남 은평교회를 개척하여 두 달쯤 지나고, 교인들이 약 30명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주 작고 볼 품 없는 여자가 낡은 한복을 입고 뒷자리에 와서 앉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여자는 예배 시간 내내 고개를 한번도 들지 않다가 축도가 끝나고 나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한 달 만에, 목사님은 드디어 이 여자를 체포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못생기고 작고 목소리도 이상하였다고 합니다. 겨우 심방 약속을 하고 찾아가 보니, 교회에서 바로 세 집 건너에 있는 아주 훌륭한 집이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벨을 누르니까, 그 자매가 반겨 주면서, 자기는 이 집의 가정부라고 하였습니다. 가정부라고 하니까, 집에 들어가기가 미안해서 현관 마루에 걸터 앉아서,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식모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살이 되어 불구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시어머니에게 소박을 맞았습니다. 남편이 비록 불구자였지만 처음으로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그나마 버림을 받고 나니 19살 여자에게 너무나 상처가 컸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비관하고 양잿물을 마셨는데,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 가서, 다 타고 남은 식도를 다시 펴서 위장과 연결하는 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로부터 비정상적인 식도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식모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끝내고 우연히 라디오를 켰는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들려왔습니다. 극동방송의 젊은이여 여기 참 삶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그 라디오의 메시지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하루 종일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집안 일을 하였습니다. 고달픈 하루하루의 생활이었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얼굴에는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집 앞 건물에 교회 간판이 붙고 사람들이 성경 책을 들고 드나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침 집 주인은 카톨릭 신자에다가 부부가 다 점잖은 대학 교수였기 때문에, 주일 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교회 생활은 이 자매에게 더 없는 행복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온갖 궂은 봉사를 제일 열심히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넘치는 감격을 가지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갔습니다. 이 자매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이런 편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전에 수술했던 자리가 아물지 않아 그 자리에 통증이 올 때마다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느낍니다. 지금의 저의 생활은 참으로 힘이 들고, 주일이면 더욱 바쁘고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목사님의 친절하신 사랑과 힘있는 말씀에 깊이 감명받고 그간 쌓인 피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주님께 드리며 찬양을 올립니다. 틈만 있으면 병원 전도를 하고 저보다 더 외롭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함께 나누며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 개척 후 7개월쯤 되었을 때에 예배 처소가 비좁아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교회 옆집에 살던 이수정 집사가 가장 걱정이 되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40분 거리를 매주 걸어서 빠짐없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계속 부흥하면서 강남의 화려한 여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파출부, 구멍가게 아줌마, 삭월세 방 노동자 등, 초라한 여인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장 초라했던 이수정 집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낡아빠진 단벌 한복을 입고 당당하게 헌금 위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수정 집사는 병원에 갖다 오는 날이면 늘 목사 집에 들르곤 하였습니다. 1982 12 18일 눈이 많이 온 그 날도 이수정 집사는 병원에 갔다가 목사 집에 들러서 몸이 안 좋다고 하면서 할머니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내가 빨리 와보라고 소리쳐서 가보니, 이수정 집사가 운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를 품에 끌어안고 큰 소리로 부르며 흔들었지만, 가느다란 눈을 잠시 뜨는 듯하더니 잠자듯이 운명하였습니다. 이수정 집사의 유품에는 저금 통장과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은 없습니다만, 주께서 주신 모든 것과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주님의 영광과 우리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3년동안 적금한 백만원, 그것을 타게 되면 다 대지 헌금으로 바치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하여 아무도 모르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 일로 목사님의 심려가 크신 것 같아,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서 부끄럽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옥 목사님은 이수정 집사의 죽음을 이처럼 회고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고생스러웠고 너무 외로웠던 그를,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목사의 품에서 죽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가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외로운 여인도 아니었다. 교인들이 그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써 장례를 치러 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더 고생하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잠자듯이 데리고 가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수정 집사님의 이야기는 정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까지 헐뜯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자화 자찬하였습니다. 그것이 12절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분류하거나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한 표준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고 비교하므로, 지혜가 없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나르시시즘 (narcissism) 이라는 단어가 유래한 그리스 신화에 보면, 나르시스라는 소년이 숲 속의 고요한 은빛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도취된 나머지, 물에 빠져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은 자기 도취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처럼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착각 속에 빠지기 쉽습니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평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거의가 착각입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또한 분량 밖의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13, 15, 16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서 하노니,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여기 분량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 measure, limits, sphere, boundary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의 영역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들 (유대주의자들,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바울을 비판하고, 그의 사도적 권위에 흠집을 내고, 자신들을 자화 자찬하며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남의 수고, 곧 바울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15).

 

오래 전에 어떤 선교사님이 선교 보고를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였습니다. 저 선교사님은 왠지 자신이 한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므로, 섣불리 판단을 하면 안되겠지요. 하나님이 다 아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요즘 설교나 논문 표절도 문제가 되곤 하는데, 남이 수고하고 고생한 것을 가져다가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프리젠테이션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 주신 분량 안에서 충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드 아일랜드에서 수 천명 교회를 일구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God measures our ministries on the basis of where He has put us, and not on the basis of what is going on in some other city. God is not going to measure us on the basis of the gifts and opportunities that He gave to Charles Spurgeon or Billy Sunday. He will measure my work by what He assigned to me. God requires faithfulness above anything else (1 Cor. 4:2) (Wiersbe).

 

그처럼 자기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남의 목장에 들어와서, 남의 양을 도적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를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양을 빼앗아 가려고 목자를 비판하였다는 것입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의 비판 (criticism)에 대한 적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First, no one is immune to criticism. Expect criticism, but don’t obsess over it. Don’t run in fear of it. Face it with strong resolve.

 

Second, criticism can be taken too lightly or too seriously. Taking criticism lightly can deprive us of opportunities for personal development and growth. On the other hand, if we take criticism too seriously, we could lose heart. If you obsess over every biting comment, every harsh email, every disapproving frown, every anonymous letter, we might shrink back with lack of confidence in everything we do. Ignore the really scathing criticism and anonymous criticism. 악의적인 비난,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에 휩싸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아들을 보러 켈리포니아에 갔었습니다. 제 아들이 저에게 요세미티를 꼭 보여주겠다고 미리부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세미티에 너무 큰 불이 나서, 국립 공원 전체가 문을 닫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불이 났습니다. 제 아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요세미티는 차로 세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인데, 하늘이 뿌옇고 목이 칼칼합니다. 메케하게 타는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그 불은 어떤 한 사람의 방화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작난으로 그랬는지, 나쁜 마음으로 그랬는지, 정신 병자인지 알 수 없지만, 방화범의 소행이었습니다.  

 

야고보서 35절은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뒤에서 가만히 불을 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6절에 그 불씨는 지옥불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런 지옥불에 불타서는 안될 것입니다.

 

Third, some criticism needs to be answered; much of it doesn’t. If a criticism is based on a misunderstanding, clear up as soon as possible. Meet in person and avoid further miscommunication. You will meet people in ministry who can say nothing good. If the critic is known as a chronic grouch… there is no need to become a pen pal with someone looking for a fight! Let it go.


다른 사람의 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화자찬의 자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은 말씀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달란트 비유에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잘하였도다” (well done) 이라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평가였습니다. 종의 평가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아니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잘하였다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절에서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9세기 작곡가 Verdi Florence에서 그의 첫 오페라는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대 뒤에서 관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선배 음악가였던 Rossini였습니다. Verdi 에게 중요한 것은 극장에 가득 찬 많은 관중들의 환호가 아니라, 대가 Rossini의 평가였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자, 남을 비판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오직 주께 옳다 인정함을 받고, 오직 주께 칭찬을 받는 가가 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빛 된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맡겨 주신 분량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